
내가 처음 읽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꼬집는 헤세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헤세의 명성 높은 작품인 『데미안』에 도전했지만, 난해한 비유와 ‘카인과 아벨’ 이야기 앞에서 결국 완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언젠가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데미안』이 전혜린 번역본 복원판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이제야말로 다시금 이 작품에 도전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마주한 『데미안』 역시 쉽지 않았다. 상징은 여전히 모호했고, 싱클레어의 주변 인물들의 역할도 간파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끝까지 읽겠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 마침내 해설까지 도달했다. 해설 속에서 나는 비유와 상징을 해독하기 위한 실마리를 하나씩 찾아냈다.
‘투사’ - 나를 비추는 거울
우리가 어떤 인간을 증오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내부에 들어 있는 무엇을 찾아내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부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다. [p.198]
대학 시절, 동아리 업무와 과제에 지쳐 이유 없이 특정 사람을 미워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잘못한 적이 없었지만, 볼 때마다 불편함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전공 수업에서 칼 융의 ‘투사’ 개념을 배웠다.
투사는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내가 억눌러온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발동하는 방어기제다. 무의식 속 생각이나 감정, 욕망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표현 욕구를 투사하고 있었음을. 그는 내가 두려워 억눌렀던 것을 자유롭게 드러냈고, 그래서 부러움과 불편함이 동시에 자리했다. 부정과 동경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 깨달음 이후로, 칼 융의 분석심리학은 내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이론이 되었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일
누구에게나 진정한 직업은 다만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것 한 가지뿐이었다. (중략) 인간의 일은 멋대로의 운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완전히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사는 일이었다. [p.225]
헤세는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이자 융의 제자인 랑 박사에게 60회에 걸친 분석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 문학이었다. 헤세는 작가로서, 자신의 인생 동안 겪은 고통과 깨달음을 한데 뭉쳐 여러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나 또한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지난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의식 속 나 자신을 향해 탐구를 이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 ‘또렷한 운명’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연의 시도(試圖)’라는 싱클레어의 말처럼, 그저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탄생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것입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아시지요? 돌이켜 생각해보고 물으십시오. 길은 그렇게도 어려운가? 라고. 다만 어렵던가요?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나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쉬운 길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p.250]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새와 알의 비유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아프락사스가 언급되는 장면보다 이 문장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어려움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기에 아름답기도 하다. 한 세계를 깨고 나온다는 것은 고통과 시련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새가 날개를 펼치듯, 우리는 새로운 발견과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데미안은 확실히 우리 자신의 분신이다.’
결국 『데미안』 속 이야기는 먼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데미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 역시 나의 데미안을 마주하며, 때로는 두려움 속에서도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