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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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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스무 살에 대학교를 입학했다. 전공은 독어독문학.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특유의 거칠고 둔탁한 음성이 매력적이라는 사유로 선택된 전공이었다. 독일과 그에 관련된 것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 그런 신입생들을 위해 마련된 전공 기초 과목으로 독일어권의 문학작품을 배우는 수업이 있었다. 그때 그 유명하다는 <데미안>을 처음으로 읽었다.

 

정확히 어떤 감정으로 그것을 읽어 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을 주제로 감상문도 제출했던 것 같지만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대강의 인상이 분명하게 남았는데, 내용이 어려운 데다 모든 인물들이 참 복잡하게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매일 하루하루를 흐르는 대로 대충 살면 안 되는 건가? 세 줄로 간략히 요약해서 말할 것이지, 참 이랬다가 저랬다가 성가신 사람들이군,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괴롭고 불안한 젊음의 일원으로서 이 소설을 막연히 동경했다. 인간 성장에 대한 이야기, 인류의 고전, 영원한 명작. 그런 소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는 그 인물들을 그저 참으로 복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정도로 정의하고 덮어두었다.

 

그러나 마음이 혼란하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면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지는 법인지, 몇 달 전부터 <데미안>을 떠올렸다. 재밌게 읽었던 어떤 책도 아니고, 그 어떤 다른 고전도 아닌 그 <데미안>을, 공교롭게도. 지금은 처음 읽을 때보다 4년을 더 살았고,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으니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다던 그 고전을 읽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이 내게 어떤 거대한 깨달음을 가져다주어, 나의 혼란과 고독을 해소해주지 않겠냐는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교롭게, 번역가 전혜린 선생의 타계 60주기를 계기로 출간된 <데미안>의 복원본 리뷰 제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책을 덮는 지금 시점에선, 책 속의 누군가가 강렬한 의지로 상대를 떠올리며 끌어당긴다면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의 의지가 알게 모르게 간절한 힘을 발휘했고 그것이 내게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신비한 연관성을 떠올린다.

 

 

 

그냥 사는 것으론 충분치 않아


 

아무튼, 그렇게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다시 접했다. 싱클레어를 향한 데미안의 기이한 접근으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이런저런 방향으로 방황하지만 종내에는 이런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역할은 오로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 선과 악, 허용과 금기, 혹은 그 너머의 수많은 제한의 벽을 허물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새로이 생각하고 정의하며 자기 근원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온전한 자신이 될 것.

 

첫 문장에서 싱클레어가 그렇게도 어려웠다고 고백한 그것. 책 속에는 여러 인물이 그런 길을 좇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려 갖은 애를 썼다. 마침내, 근 몇 년간 읽은 책 중 가장 어려웠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책상에 덮어두었다.

 

앞에서 스무 살 적의 감상으로 서문을 열었으니 이 책을 다시 읽은 혼란한 시기의 스물넷은 본질적이고 내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고 즉시 고백하겠다. 나는 데미안처럼, 싱클레어처럼, 에바 부인과 그들의 동무처럼 열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런 질문 하나가 내게 샘솟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슨 가치를 갖는가?

 

인간은 대체 무슨 존재이고, 그 존재는 어떤 가치를 지니며, 나라는 존재가 무슨 가치를 갖는가?

 

그러므로 어째서 그들은 끝끝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 부단히 노력하는가? 내가 철저히 자신으로 살기 위해 충실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조용한 상실, 분명한 공허감


 

어릴 적부터 모두가 습관처럼 했던 말 중 하나라면, 나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것이었다. 어린애의 자존감을 키워 세상에 나설 힘을 만들어주기 위한 맹목적인 문구를 나는 어느 순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십 대의 후반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때도 그 문구가 사실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자기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기대와 확신으로 가득 찬 나이니까, 나를 깊숙이 파고드는 일이 그리도 즐거웠다.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만사를 새로이 정의하며 나만의 목표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한 일의 가치는, 그리고 그 결말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춘기의 영향 아래 그때만큼 자신에게 충실했던 적이 없었다.

 

그치만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 오늘날의 나는 싱클레어의 방황과도 비슷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개선과 자아 탐구에는 관심도 없는, 순간의 즐거움을 따르는 상태. 그리고 언젠가 남들처럼 취직을 해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막연한 흐름을 그리는 지금만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찌르는 인물들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왜 내가 보통의 규칙을 와해하고, 새로운 탐색을 시작해야 하는 건데?! 내가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가고, 고독해지고 외로워지고,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고 해서 누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줄까? 오히려 오춘기 같은 별명으로 헛되이 방황한다 여기지 않겠느냐고! 딱히 싱클레어나 데미안 그네들처럼 되어볼 의지도 없으면서 괜히 심술을 부렸다.

 

하지만 그로서 나에게 결핍된 것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직선의 길을 따라 내 안을 흐르는 지금의 물길이 그 자국을 얼마나 무난한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니. 굽이치지 않고, 주류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흐르는 여러 개의 작은 물줄기들도 없는 심심한 모양의 갈래가 나의 내면을 침묵하게 만든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그 존재를 드러내지만, 사라진 것은 다만 그곳에 공허만이 남기 때문에. 빈 공간은 생각을 멈추게 하고, 공상과 탐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의 독특성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도 없고, 무의미할 뿐이야"라는 생각이 탈출을 금지하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가끔은 이유 모를 실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데미안>에서 그 이유를 얻지는 못했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지금의 조용한 내면이 경고하고 있으므로 부정할 수 없다.

 

이제서 다시 어른들의 습관적인 문장을 떠올린다. 나는 소중한 존재라고. 그리고 그 문장에 이제는 하나를 더해야 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말이다. 그 다른 누구를 위해 소중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내가 살아있고,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나의 존속을 위해 나의 가치를 가장으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아직 수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내년의, 혹은 몇 년 뒤의 나는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게 될까. 여러 차례 다시 그네들을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이 소설을 읽고 깊은 깨달음도 얻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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