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연극으로 빗대는 비유는 지겨울만큼 익숙하다. 이 세상은 연극 무대이고, 모든 사람들은 단지 배우일뿐이라는 셰익스피어 명언의 영향일 테다.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떼고 보더라도 이 말이 현재까지 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이유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막과 장으로 이뤄진 극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모두 일정 역할을 부여받아 그를 연기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로도, 세상이라는 무대를 배우처럼 누비며 살아가라는 희망적인 의미로도 읽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 작품을 만나고 나는 이 말에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삶의 풍경들은 연극처럼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단 한 번만 펼쳐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바꿔 말하면 몇 가지의 역할을 수행해내든, 몇 번의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을 갈아끼우든 간에, 삶이라는 무대의 막은 단 한 번 걷히고 또 닫힌다는 진리를 남긴 작품, 바로 연극 <유령>이다.
무대에 오른 배우는 뜻밖의 대사로 극을 연다. "저는 이번 연극에서 배씨, 정씨, 그리고 다시 배씨를 맡았습니다." 라며, "그냥 연극을 시작하면 되지 이런 말은 왜 하냐고 물으실지 모르겠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서사극이 지녀야 할 제1의 덕목이라면 관객이 허구의 문지방을 무사히 넘어 극에 빠져들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유령>은 이것이 허구의 이야기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소격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일종의 극중극 형식을 몇 겹으로 사용해서 말이다. 주인공 배씨가 폭력적인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는 것마냥 과장되게 꾸며져 있고, 흐르는 음악들도 하나 같이 작위적이다. 분장 스탭을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해 배씨의 상처와 주름을 직접 그려주고, 악인을 연기하는 배우는 직접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무대와 삶, 역할과 본질의 경계를 자꾸만 흐려놓는다. 마치 관객이 서사에 집중하는 것을 끝까지 방해하듯 말이다. 아니, 사실 집중할만한 일관된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삶의 무자비한 무질서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연극 <유령>에서 배우들은 다수의 역할, 혹은 정체성을 지닌다. 이야기가 점차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빠져드는 건 그 때문이다. 각자의 역할에서 빠져나온 배우들은 무대감독을 호출해 어떻게 이런 연극이 있을 수 있냐며 따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와 연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그저 그들이 해당 무대를 내려다 보는 일방적인 시선만 존재한다. 마치 인간들이 막막한 무대를 어떻게 누벼가는지 흥미롭게 내려다 볼 뿐인, 비가시적인 신(神)의 시선 같다. 작가는 수정된 대본을 보내줄 뿐이라는 점에서, 가끔 운명이니 신탁이니 하는 형태로 작은 힌트들을 던져줄 뿐인 신을 닮았다.
게다가 관객들 사이에 섞여 있던 배우가 무대로 난입해 직접 감상을 전하기도 한다. 관객석과 무대 사이에 놓인 금단의 경계를 넘는 일도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온 세상은 무대'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관객석이든 백스테이지든 할 것 없이 모든 곳이 서사의 축이 된다. 무자비하게 옮겨가는 축을 따라, 관객들은 자연히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 역시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무대임을 깨닫게 한다. 관객은 그 자리에서 조용하고 때때로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후반부에 가서 연극 <유령>은 또 다른 서사를 진행시킨다.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무연고자로 남아 버린, 차가운 냉동고에 반년 넘게 갇혀 갈 곳을 잃은 인물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그들은 각자 무연고자 유령이 된 이유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화장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시신을 내려다 본다. 적법한 제의를 거친 그들은 그제야 특정 역할에 아등바등 충실해온 자신을 향해 주어진 대사가 아닌 진실된 마음의 소리를 전하고, 후련히 떠나게 된다.
오랫동안 유령은 삶이라는 조건을 박탈당했음에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해 쓸쓸하게 구천을 떠도는 무언가로 그려졌다. 그들은 육체를 잃고 원념으로 찬 혼만 남은 상태에서 갈 곳을 잃은 존재, 생생한 숨을 뱉으며 무대 위에서 대사를 토해내는 산 자들을 해코지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유령은 '원할 때 무대를 내려올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삶이라는 무대에 갇혀 탈출할 수 없는 존재. 죽어서까지 살았던 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토해내야만, 정해진 대사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 말고는 방법을 알 수 없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곳에 있지만 보이지 않기를 요구당하는, 나아가 강요당하는 존재. 이것은 곧 무연고자의 원관념 그 자체가 된다. 그들은 살아있을 적부터 유령의 역할을 강요당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극 <유령>이 그리는 유령들은 한없이 쓸쓸할 수밖에 없다.
무연고자들은 사회의 보호와 관심 밖에서 사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 즉 무대가 어떠했고 어떤 대사들이 오갔는지, 그 무대의 가치는 어디에 있었는지 증언해줄 또 다른 상대 배우를 만나지 못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발화의 기회를 주고, 또 다른 서사 속으로 잠시 도피할 기회를 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무대를 다시 끌어낼 수 있도록 또 다른 장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유령>은 아주 다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다시 초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연극의 매력은 이 순간, 여기에서 단 한 번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화와 달리 연극은 현장성을 특징으로 한다. 관객의 기침 한 번, 백스테이지의 부스럭대는 소리 한 번, 배우의 걸음 한 번 등의 모든 요소가 매번의 연극을 새롭게 한다. 연극의 시간을 미루고 또 재촉하며 매번 색다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히 관객도 매번 다른 관객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특정 사회적 역할, 혹은 주입된 이상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빠르게 과거가 된다. 하나의 장이 끝나고, 잠시 암전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그 과거를 반추해본다. 다음 장에서는, 단 한 번으로 지나쳐 버리는 다음 장에서는 어떤 걸음을 걷고 어떤 대사를 말해야 할지 고민해본다. 주체적인 선택의 길을 작게나마 열어본다. 그리고 빛이 내리쬐는 무대에 떠밀리듯 올라가면, 그곳에 선 것이 나뿐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게 상대 배우의 눈을 바라본다. 호흡을 길게 맞춰본다. 무연고자로 태어나 나의 삶만을 선형적으로 연기하던 우리가, 서로의 연고자가 되어주기로 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한다. 그것이 연극 <유령>이 내게 남긴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