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고민, 눈물, 위로. 조금만 더 지나면 추억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사춘기를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설명하고 있는 내 인생의 키워드다. 이렇다 할 거창한 사건 없이도, 바람 한 점 안 부는 곳에 서서도 한없이 흔들리고 있는 걸 보면 혼란이 그야말로 나의 천성인가 보다- 생각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에 마음이 끌렸다.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저마다의 삶의 풍파에 창작이라는 방식으로 맞서온 이들이라니. 내가 지금껏 예술가를 동경해온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어떤 예술 작품을 만나더라도 - 특히 그림의 경우 - 작품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삶과 고민에 눈길이 가고는 했다. 저마다의 고통과 고민 속에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우아한 몸부림, 그 역설적인 장면을 포착해 내려는 유일한 방법에 저절로 이끌렸던 모양이다.
마이클 페피엇이 사랑한 예술가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도서인 만큼, 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어 책날개와 서문을 꼼꼼히 읽었다. 책의 저자는 마이클 페피엇, 세계적인 미술사가이자 전기 작가, 그리고 큐레이터로 활동해온 그는 지금은 현대미술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페피엇은 그가 추앙해온 27인의 예술가와 그들에 대해 써온 글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삶 속에서 허무와 좌절, 외로움을 깊이 경험하고도 예술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이들이라는 것. 이 책은 그 사랑스러운 예술가들에 대해 써온 평론을 모아 한 편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또한 페피엇은 이 글 속에 녹아든 자기자신의 모습, 미술을 사랑하는 동시에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스스로의 지향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예술은 나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서, 어떤 형식이든 예술작품을 꾸준히 향유하는 사람들은 결국 "나"를 가장 잘 설명하고 동시에 "나"를 구성할 무언가를 끝없이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에 대한 감상마저도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지지하는 방식, 말하자면 자기변호의 맥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피엇이 사랑하는 예술가들을 엿보며 그를 알아가고, 내 마음에 와닿는 예술가를 찾아가며 나 또한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설렘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모든 초상은 자화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린 초상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화상만큼이나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초상이 또 있을까?
- 들어가는 글 : 위대한 예술가들의 초상이자 나의 자화상 中
빈센트 반 고흐
스물일곱 편의 칼럼이 모인 이 책의 첫 번째 주인공은 그 이름도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였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니며 여러 미술관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있고, 지난겨울부터 3월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되었던 <불멸의 화가 반 고흐> 展에서 반 고흐의 뜨거운 인기를 체감한 바 있었다. 이렇듯 이미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고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텐데, 그의 이야기로 책을 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까? 작은 의문을 가졌던 나는 곧 저자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고흐의 생애는 유명하다. 부모와의 불화, 예술에 대한 열망, 동생 테오와의 형제애, 그리고 가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지만, 끝내 그가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비운의 천재 작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페피엇은 전혀 새롭지 않은 이 이야기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처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던 고흐와 테오의 응원. 독자로서 읽어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의 광기와, 그 모습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망까지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선생님처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고흐의 작품에 감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 사실 페피엇 본인의 감상이겠지만 - 감정을 언어로 정리해서 들려주는 이 챕터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명화도, 예술가의 삶을 느끼는 순간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고흐는 책 전체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숨결'이 무엇인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딱 좋은 1번 타자였다.
그러나 반 고흐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는 이유에 관해서라면 미스터리한 것이 없다. 그의 예리한 시선의 초점이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조건, 즉 우리 자신의 운명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중략) 결국 반 고흐가 발휘하는 불멸의 천재성의 근원은, 그가 내면의 혼돈에 부여한 질서다.
- 빈센트 반 고흐 : 그림자와 햇빛 사이에서 中
파블로 피카소
다음으로는 피카소의 챕터를 펼쳤다. 이렇게 백과사전처럼 관심 있는 예술가의 이야기로 건너뛰며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아주 좋은 점 중 하나다. 각 예술가에 대한 페피엇의 개별 칼럼이 묶인 이 책은 (물론 예술가를 특정 파트, 특정 순서에 배치한 저자의 의도가 있겠지만) 독자의 자유도가 높다. 나는 새로운 화가 소개에 앞서 이미 아는 예술가들에 대해 조금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술가들에 대해 저자가 가진 생각을 보며 저자를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먼저 읽기로 선택했다.
입체파의 대표자인 피카소의 이야기는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었다. 각 챕터의 제목 아래에는 그 칼럼을 쓰게 된 페피엇의 계기나 글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함께 적혀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번에는 패션 매거진에서 의뢰를 받고 작성한 글이었다. 한 시대의 저명한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홍보하고 살아가야만 했던 피카소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의상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피카소는 하나의 착장을 고수하지 않고 그때그때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옷으로 드러냈다. 그의 복장에는 어느 정도 의도가 들어가 있었으며, 아주 가난한 사람처럼 입어도 상관없을 만큼 부유해지고 싶다는 피카소의 말은 복장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페피엇은 이 글을 의뢰받았을 때 주제가 너무 가볍지 않을까 고민했다고 밝혔지만, 이 글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피카소의 모습을 비추며 읽는 재미를 선사했다. 회사원의 삶이 회사에만, 선생님의 삶이 학교에만 있지 않듯이 예술가의 삶이 그림 속이나 화실 안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의 일상을 엿보니 그가 활자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허울뿐인 사람들만이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 말에는 나도 공감한다! (중략) 스타일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20세기의 거장 피카소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보여주려 했을까?
- 피카소 : 예술가가 세상에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 中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이름과 시계들이 흘러내리는 대표작(<기억의 지속>), 그리고 '초현실주의'라는 키워드만 익숙한 예술가였다.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피카소의 챕터를 읽으면서 간간이 언급된 - 겉모습을 통해 자신을 확실하게 브랜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 내용만이 내가 가진 배경지식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건 비교적 짧은 길이로 구성된 글의 간결성과 흥미로운 내용, 그리고 글을 응집력 있게 써내는 페피엇의 필력 덕분이었다.
달리의 이야기는 다른 작가가 쓴 살바도르 달리 전기에 대한 요약과 코멘트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성격과 개인적인 결핍, 예술에서의 도전, 부에 대한 열망 등은 그의 인생 곡선이 오르내리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그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자극한다. 나아가 달리의 감정을 상상하고 그에 공감하거나 판단을 해보면서, 그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달리가 워낙에 치밀히 자신의 페르소나(가면)을 만들어 놓은 바람에 우리는 그가 내보인 그대로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통찰력 있는 예술가이자 자기 잇속에 밝은 쇼맨인 별종으로 말이다.
전기 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화가가 정말로 스스로를 부끄러워 했을까? 사실 그 답은 중요하지 않다. 이 전기가 전하려는 것은 훈계라기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떤 삶에 대한 믿을 만한 공정함이다.
- 살바도르 달리 : 부끄러운 삶 中
이 외에도 책에는 이름만 들어보았거나 아예 처음 알게 된, 아주 생소한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가령 자코메티의 챕터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희곡 작가 베케트와의 친분을 암시하는 제목에 신기함을 느끼고 펼쳤는데, 알고 보니 페피엇이 아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예술가여서 더욱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예술가의 이야기를 찾아보거나, 새로운 화가를 알아가기 위해서 랜덤한 큐레이션을 찾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예술가 백과사전인 셈이다.
그림 자체에서 감동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술가의 숨결을 느껴야 비로소 의미를 알아챌 수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떤 작품에 반드시 특정 메시지나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라는 또 다른 차원의 질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의미 탐색에 몰두하고 싶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곁에 두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