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치유의 미술관 - 사실 그들은 삶의 찬미자였다

글 입력 2024.12.0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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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와 물음표 가득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24와 2025의 경계에 선 나는, 올해의 끝자락을 붙잡고 끈질기게 자문한다. 올해 나는 기어코 뭘 해냈고, 무엇을 얻어냈는지.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큼 아차! 싶은 후회도 한다. 이걸 해야 했는데, 저건 하지 말아야 했는데... 대부분의 원인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다 계획한 것들을 끝내지 못한 데 있다.


내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주로 강아지와 위인들의 성공 신화에 맞춤 설정 되어있다. 돋보기를 누르면 쏟아져 나오는 누군가의 위대한 업적들은 후회와 불안에 화력을 더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꿈꾸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성공의 세계를 보고 있자면 도파민이 샘솟는다. 나는 꿈꾸는 성공을 마치 내 것처럼 착각하고, 짜릿한 환상에 빠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휴대폰을 덮고 나면 다시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들에 휩싸이는 것이다. 성찰이라기엔 너무 가볍고, 자각이라기엔 너무 투박하다. 그렇게 나에게는 집 소파에 앉아서도 몰아치는 소란들을 처리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아, 그냥 되는대로 막살까’ 하다가도, 다음날 출근을 걱정하는 나를 보며 콧방귀를 뀐다. 귀찮고 집요한 구두점들은 퇴근길에도, 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물며 여행지에서도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내가 써 나가는 문장들에 쉼표와 마침표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명확한 쉼, 개운한 끝맺음. 후회 없는 노력 말이다. 동시에 또다시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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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미술관>을 고른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 스스로에게 예술을 통한 치유, 쉼, 환기라는 일종의 처방을 내린 것인데, 생각보다 더 내 증상에 들어맞는 특효약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과거의 난 예술과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흥이 없었다는 편이 맞겠다. 전시회나 박물관, 다큐멘터리를 볼 때에도 그렇구나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 없이 흘려보낸 것들이 더 많았다. ‘강한 색감을 썼네’, ‘질감을 거칠게 표현했네’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읊어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예술에 희열을 느낀 건 몇 해 전, 그러니까 약 4년 몸담은 첫 회사를 퇴사했을 때였다. 한 달 정도 여유 시간이 주어졌고, 엄마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 본 살아 숨 쉬는 역사와 내 눈 앞에 생생히 부유하던 예술은 숨이 멎을 만큼의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성당에서, 미술관에서, 유적지에서, 구시가 거리에서 내 고민은 압도됐다. 한낮 먼지처럼 툭툭 털려 나가는 번뇌를 보며 예술의 위대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온 힘을, 생애를 바쳐 만든 작품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떤 생애를 겪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만큼 대단한 것들을 창조해 냈을까.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그때 시작된 예술에 대한 감동은 이 책을 통해 더 구체적인 삶의 의미로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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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반 고흐는 낮의 광휘보다 깊은 밤의 색채를 더 좋아했다. 차분한 밤하늘의 푸른빛과 생동감 있는 노란빛의 대립적인 연출을 즐겨 활용했다.


깊은 밤은 외로움과 싸우며 침잠하는 그의 소외된 세계다. 그림을 향한 열망, 고양하는 에너지는 노란색으로 표현됐다. <밤의 카페테라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작품들은 모두 그의 심각한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현실과 이상, 슬픔, 꿈 같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그의 모든 것들은 그림으로 들어가 아직도 생명을 다하고 있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느꼈던 고통은 지금까지도 찬란한 빛으로 남아있다.



반 고흐는 알고 있었다. 별빛의 맑음 너머로 무수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꿈꾸게 한 것이 저 별빛이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아를의 밤하늘에서 반짝이던 그 별빛들이 캔버스 위에서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는 동생에게 말했다.

 

- 34p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밑줄 친 문장들이 빠르게 늘어갔다. 몸과 마음을 다해 ‘진짜’ 삶을 살아낸 불꽃 같은 사람들. 대단한 업적보다는 그들의 말이, 행동이, 생애가 마음을 동하게 한다. 출근을 몇 시간 앞둔 새벽에도 이들의 이야기는 눈을 쉬이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거엔 예술 거장들을 보면서 반항아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고 그림으로 포효하고, 제 멋대로 대담하게 섞은 색을 캔버스 위에 툭툭 거칠게 올려놓는 상상. 혹은 세상과 단절한 채로 그림만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광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단단히 잘못 짚었다는 깨달음을 준다. 그들은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다. 배신하고, 상처 주고, 고통까지 선사하는 세상을 꽉 끌어안고 살았다. 또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깊은 상처도 숨기지 않고 직면했으며, 폭풍우 같은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묵묵하게 할 일을 했다. 성실한 노동자이자 삶의 찬미자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 미술사학 교수인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반 고흐의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의 화가>를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가엾은 사람의 그림자에 비유했다. 그림 속에서 반 고흐는 노란 밀짚모자를 쓰고, 무거운 화구를 어깨에 진 채 양손 가득 캔버스와 그림 도구들을 들고 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오후의 긴 밀밭 길을 반 고흐는 짙은 그림자와 걷고 있다.


누구보다 뜨거운 삶을 산 이들이, 나에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고되고 불안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생애 자체로 나를 위로하고, 삶을 사랑하는 태도를 일깨워 준다. 불안과 후회에 짓눌릴 때마다, 나는 삶을 끌어안고 쉼표와 마침표를 더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나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피고 다시 나아간다. 샤워하고, 출근하고, 글을 쓰고, 집을 청소하고. 그렇게 노동자이면서 찬미자로서 살아가려고 한다. 내리쬐는 햇살과 주변의 변화에 감각을 열고, 오늘의 시간을 충만히 살아가야지.


 

실패는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학습 과정이고, 삶은 이 같은 학습 과정의 연속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더 이상 성공과 실패로 양분되는 곳이 아니라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다.

 

-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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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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