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것이 어떤 상처이든 간에 - 연극 '붉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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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러 가기 전 작품 소개와 시놉시스를 먼저 읽어보았다.
‘1904년 전쟁의 광기 속에서 고통받는 형제와 2024년 작은방에서 고독하게 스러져가는 청년의 이야기’라는 소개 글을 보았을 때 시대도 다르고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이 두 개의 스토리가 어떻게 하나의 연극으로 이어진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나는 알게 되었다. 전생 속 고통받는 형제와 고독하게 스러져가는 청년은 모두 ‘붉은웃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1904년,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피폐해진 영혼으로 돌아온 형은 두 달 동안 책상에서 쉬지 않고 글을 쓰다 죽음을 맞이했다. 무엇을 쓰는지, 왜 책상 앞에서 쉬지도 않고 쓰기만 하다가 죽었는지,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 동생은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형의 죽음을 더 알고 싶다. 그는 형에게 질문한다. 도대체 붉은 웃음이 무엇인지를…
2024년, 쓰레기로 뒤덮인 한 평 남짓 작은 원룸에서 한 청년이 죽은 지 두 달이 넘어서야 발견됐다. 집주인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유품 관리사에게 청년 고독사는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실례합니다." 간단한 목례 후 방문을 열자 작은방을 채우는 무거운 질문이 그를 맞이한다. 젊은 영혼은 왜 이 작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홀로 쓸쓸한 죽음과 함께 고립되어야만 했을까…
연극은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두 다리를 잃은 형이 전쟁 속에서 인간들의 광기와 인간성 상실을 목격하면서 내면에 자리 잡은 고통들을 글을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도 깊어 형은 끝내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2024년에는 한 평 보다 작은 원룸에서 고독사한 청년의 방을 정리하러 온 유품 관리사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현대사회의 사회적 고립 등을 그렸다. 그 청년의 방에는 고통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흔적들이 남아 있고, 이는 전쟁의 상처와 다를 바 없는 현대사회의 상처를 보여준다. ‘붉은웃음’ 연극은 각각의 시대를 교차해 전개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절망 속에서 고립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전쟁과 사회적 고립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이 질문은 각 시대를 초월해 현대사회의 관객들에게도 의미 있는 주제를 던진다.
무대의 연출 또한 상당히 기억에 남는다. 검정 비닐봉지 더미는 고독사한 청년의 유품들이자, 현대 사회의 고립과 죽음을 상징하게 된다. 이는 단지 쓰레기 봉지 더미가 아닌 사회적으로 방치된 결과가 쌓였다는 의미를 남긴다. 또한 무대 한쪽에 있는 모래와 검은 재 등은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며, 두 다리를 잃은 형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무대 배치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장면전환이 이뤄질 때 과거는 모래와 검은 재, 현재는 검정 비닐봉지 더미로 표현해 장면전환을 관객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배우가 검은 봉지에서 흐르는 물로 온몸을 적시는 장면은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무겁고 어두운 작품인 만큼 무대연출 또한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잘 표현한 것 같았다.
연극 ‘붉은웃음’은 전쟁과 고독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전쟁의 피폐함과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현대 사회의 청년 고립과 절망을 구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연극은 전쟁의 상처든 사회적 고립의 상처든 결국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공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연극을 관람하며 전쟁의 흔적은 육체적인 고통이며 현대 청년들의 고립된 절망은 정신적인 고통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결국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주제인 만큼 단순히 연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여운이 짙게 남은 작품이었다.
우리는 결국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연대할 수 있을까?
[고다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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