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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안희정을 지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책 『몰락의 시간』을 읽으며 그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 적이 있다. 하지만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면서 그가 가진 권력이 어떻게 피해자 김지은 씨를 옥죄어 왔는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갑갑해졌다. 초반에는 그 위력이 얼마나 큰지 상상이 되지 않아, 첫 번째 성폭력을 참고 넘겼던 김지은 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활동가로서 부끄러웠다. 내가 무의식중에 피해자를 탓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더 깊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어떤 위력 앞에서 그냥 참고 지나가 버린 일이 없었나?' 작은 일부터, 무의식에 깊이 박혀있던 일까지 기억이 떠올랐다. 회사에서 커피 심부름을 해야 했던 일, 2차 회식에서 마음이 불편했던 노래방 사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촌 오빠가 브라끈을 튕기며 놀렸던 불쾌한 기억들. 모두 묻어두었지만 썩어가던 경험들이었다.

 

그리고 20대 초반, 모텔에서 일어난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남자가 내 가슴을 만졌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 방을 빠져나왔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나를 괴롭힌다. 그때 내가 더 용기 있게 대응했더라면, 친구와 이 일에 대해 얘기했다면, 그 후의 우리의 관계도 달라졌을까.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중요성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연인 간에도 성폭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과거 내가 섹스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돌아봤다. 내가 정말 원해서 했던 게 아니라, 부채감이나 압박감에 따른 결정이었던 것 같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소모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더 미안하다.

 

책을 읽으며 지켜준다는 표현이 얼마나 구닥다리인지, 존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앞으로는 스스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나와 내 파트너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관계를 꿈꾼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답답함은 결국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해자가 왜 침묵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질책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제는 용기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준 김지은 씨에게 고맙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어 감사하다. 이건 김지은 씨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이제라도 나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함께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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