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봤다. 포스터 속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는 우정에 바라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달려와 줄 수 있는 친구,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친구, 내가 나일 수 있게끔 편안하게 하는 친구, 누가 뭐래도 "네가 너인 게 약점이 될 순 없어"라고 얘기해주는 누구보다 든든한 친구. 누구나 바라던 그런 친구의 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희는 재희대로 사랑을 한다. 사랑할 땐 보호필름 떼고 하는 거라고 말하는 재희는 사랑 앞에서 솔직하고 재고 따지는 게 없다. 부러우리만큼 걱정되리만큼 그렇게 달려든다. 흥수는 흥수대로 사랑을 한다. 다만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성애적 사랑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기에 사랑 앞에서 겁도 많고 스스로의 성적 지향을 받아들이는 데 힘겨워한다. 흥수를 가장 품어줬으면 하는 흥수 엄마는 동성애를 병 취급하며 매일 새벽기도를 한다. 고쳐지길 바라며.
내게는 그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이야기였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영화였기 때문에, 성적 지향이 다른 것은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대중매체를 통해 다뤄진다는 게 반가웠다. 하지만 영화를 본 직후 내가 종종 들르는 카페 사장님에게 이 영화 강력 추천이라며 이야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뜻밖이었다. "게이가 나오는 영화는 안 본다" 순간 멈칫했다. 이유를 묻자 "굳이 게이의 로맨스를 보고 싶지 않다"라 답했다. 순간 화가 났다. 그게 왜? 게이가 뭐 어때서? 게이가 사장님한테 피해를 줬어요 뭘 했어요? 실망한 기색을 기어코 감추지 못하고 "와... 우리나라 아직 멀었네요. 안녕히 계세요"라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나름의 일침이었다.
가게를 빠져나와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에서 나온 대화 "자기랑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너무 많아"가 떠올랐다. 사장님이 게이를 열등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만 그 말에서 사회가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엿봤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그저 존재할 권리가 있는 이야기일 뿐인데, 왜 배제되는 것일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다. 나는 한 때 내 성적 취향을 의심한 적이 있다.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내면 질투하고 내가 1순위이길 바라며 소유욕을 느끼기도 했던 때는 '알고 보니 나 바이섹슈얼, 양성애자 인가?' '문화의 주입식 교육으로 이성애자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나?' 라고 혼란스러웠다. 사랑이 모든 감정의 총합이라면, 사랑 기쁨 이별 슬픔 그리움 미움 기다림 또 지움 이라면 나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흥수의 사랑이 특정 성적 지향 때문에 '볼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배제될 때,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느낀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공정함에서 출발한다. 롤스에 따르면, 사회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더 나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성적 지향이나 성별, 인종과 같은 차이로 인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무가치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고, 사랑이란 주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게이의 사랑은 안 본다"는 말은,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공정하지 않다. 특정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로 바라보면,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덕을 실천하는 일이다. 게이 커플의 로맨스도 우리 공동체의 일부다.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선을 저버리는 것이고, 이는 정의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칸트의 의무론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도덕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성소수자에게만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들의 사랑과 이야기를 배제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굳이 볼 필요 없다"는 생각은, 그들이 사람으로서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중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를 인정하는 것. 그것만이 필요하다. 다르지만 결코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친한 사장님에게 일침을 가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판하는 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 뻔했다. 다시 생각해 봤다. 왜 사장님은 게이의 사랑을 보는 것이 불편했을까. 일단 우리는 세대도, 살아온 세월도, 성별도 다 다르다. 나는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고 특히나 여성 인권 운동단체에서 일하면서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인, 아동, 청소년, 이주민,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하여 고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니 어쩌면 나야 말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 시선에서 선민의식을 가졌던 거다.
동물의 동성애와 양성애는 자연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약 1500여종에서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인과 소년 간의 동성애가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세상에 더 크게 소리 지르듯 나오면 좋겠다. 그들이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커밍아웃을 한 뒤 받게 될 충격을 생각해 숨지 않아도 될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건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잘. 영화 <원더>에 안면기형장애를 지닌 아이가 나온다. 사람들이 괴물 보듯 그를 바라보고 도망간다. 그 영화에 나왔던 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외모는 바꿀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