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 진실과 회복

나는 이제 꿈을 꿔
글 입력 2024.04.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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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화날 때 손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 싫어. 문 두드리는 소리도 싫은 거 같아. 문 두드리는 소리 뒤의 침묵이 무서워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이 안 되잖아.


첫마디를 꺼내자마자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서 마지막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최근에 깨달은 건데, 난 그 사람이 무서워.


친구들은 눈빛을 주고받고는 되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이건 단지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희끄무레한 이상형을 더듬거리다가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공포, 얼어붙고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이 격동을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라는 것. 화날 때 누구나 손이 먼저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너무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아서 나는 모두가 이런 줄 알았어.


나를 피해자라고 말한다면, 나는 피해자가 될 것이다.


나를 방관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방관자가 될 것이다.


나를, 무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아직도 나는 내가 피해자인지도 방관자인지도 혹은 그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그건 너무 옛날 일이야.


나는 아직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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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허먼은 책 『진실과 회복』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생존자가 공동체와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때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환경이 여전하다면 돌아간 공동체에서 생존자는 어떻게 회복을 해나갈 수 있을까? 생존자의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우리, 즉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나는 나를 생존자라 정의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폭력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했다. 어느 순간 내가 당한 일을 잘 알지 못하며, 그것을 이해하려고 보낸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허먼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복의 궁극적 단계로서 정의 실현과 공동체의 지지라는 주제를 끌어낸다.


나는 이 주제를 언젠가 꺼내보았지만, 코웃음 소리를 들을 뿐, 지지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나에게 지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끔 나는 상상하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일은 너무 큰 기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걸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꿈꾸게 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온 것이 기뻤다. 책이라는 물성으로 주디스 허먼의 목소리가 빚어진 일이 기꺼웠다.


특히 2부가 기억에 남는데, 인터뷰에 참여해 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정의의 비전을 그려내고 논의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해자와 공모하여 존엄을 훼손시킨 폭력을 은폐한다. 그런 세상 가운데서 주디스 허먼은 생존자의 목소리에 반드시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건을 예방할 필요도 있지만, 사건을 이미 겪은 이후의 삶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계속 살아 나갈 수 있어야만 하며, 삶을 모든 순간에 있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생존자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훼손된 존엄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꾸려나가며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꼭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던 나는 어느 순간 일어나 앉아있었다. 책을 꼭 끌어안아보았다. 어떤 온기가 차가운 표지와 책장 너머 글귀에서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더 나은 내일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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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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