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중문화는 예술이 될 수 없는가?

글 입력 2023.12.0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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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리그. 예술이라는 단어의 끝에는 이 짧은 구절이 꼬리처럼 붙어 다녔다. 문화생활은 예술과 거의 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미술작품. 프랑스 영화처럼 감독이 숨겨놓은 의미를 해석하며 즐겨야 하는 영화. 혹은 전시회를 가거나, 음악회를 가거나, 연극을 보는 것.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이들을 위한 말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밴드의 음악을 듣는 것. 음악 프로그램 방송에 방청객으로 가는 것. 집에서 조용히 팝송 듣는 것. 유튜브에서 좋아하는 크리에이터의 영상을 보는 것. 만화책을 읽는 것. 누군가 문화생활이라는 것에 대하여 질문할 때 이런 것을 주로 한다고 말해보자.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표정이 그려진다. 나는 아직 앞선 말한 것을 문화생활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못 봤다. 잘 춰주면 취미생활이었고, 대부분은 시간 죽이는 일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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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jo Kwarteng via Unsplash

 

 

대중문화는 무엇일까. 그들이 즐기는 대부분의 것들이라고 하자. 아이돌의 노래, 직캠 영상.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흥행영화. 빌보드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팝송. 누구나 즐기는 것들. 모두가 즐기는 대중문화는 그들만의 리그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뜻하는 대상은 나와, 너와, 우리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각종 리뷰에 미친 사람들. 나로부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시선에 잡아먹힌 사람들.

 

우리나라는 아주 소수 사람만이 특권처럼 누릴 수 있는 것일수록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격이 비싼 물건일수록 더 잘 팔린다는 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게 마케팅 전략으로 먹힌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현실이 이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 밑바탕은 아마 상대적 우월감이다. 너는 가질 수 없는 걸 나는 가지고 있다는 허영심이다.

 

대량생산이 대중문화를 만들었다. 조선 시대나 중세의 봉건시대의 삶에서 대중문화는 불가능하다. 평민과 농민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쁘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해서 잔다. 노래를 듣고 그림을 그릴 여유가 남는 건 기득권인 귀족뿐이다. 수요와 공급 모두 한정적인 시장이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에 맞춰 돌아간다. 자연스럽게 작은 파이가 만들어진다. 소수를 위한 소량생산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레드오션이었다.

 

지금은 대량을 넘어 초과 생산시대다. 예술도 똑같다. 스마트폰에 애플리케이션만 다운 받아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 비싼 돈 들여서 장인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길거리에 널린 게 실용음악 학원이다. 심지어 유튜브 동영상만 찾아봐도 작곡을 배울 수 있다. 수준의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생산이 가능하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곧 생산자다. 생산량은 아마 그 제곱을 넘어선다.

 

소비자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큼 있다. 거기다 플러스알파를 해야 한다. 컴퓨터, 태블릿, 텔레비전 가릴 것 없이 뭐로 만들어도 기기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세상, 팍스 미사(Pax Missa)다.


지금의 세상은 문화예술이 대량생산을 만나 덩치가 커졌을 뿐이다. 그 가치에 상업성이라는 항목을 하나 더 넣었을 뿐이다. 상업적인 것은 예술이 될 수 없을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건 예술이 아닐까. 빵이 한 개만 있을 때는 빵이고 수백 개가 있으면 밀가루 덩어리가 되는가. 허영심이라는 쓰잘 것 없는 색안경만 치워버리면 해결될 문제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거장 앤디 워홀. 팝 아트를 이끌어간 위대한 예술가인 그의 작품도 아주 짙은 상업성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한 명의 예술가라고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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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uri Mejia via Unsplash

 

 

작품을 만드는 그 사람만의 세계관 혹은 가치만 있으면 된다. 그렇기만 하다면 모든 것이 예술이다. ‘저딴 게 무슨 예술이야. 예술은 이래야지’라는 사고방식은 선민사상과 우월감에 찌든 족속의 망언이다. 스스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없고, 보여주고 싶은 자기만의 세계도 없는 것. 인기만 좇으며 비슷하거나 똑같은 걸 반복적으로 공장 마냥 찍어내지만 않으면 된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많은 생산자가 많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공급이 충분하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감상이라는 행위로 소비할 수 있다. 수요자도 공급자도 많아지니 소통의 장이 커진다. 1부터 5까지 있을 때와 100까지 있을 때 경우의 수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커지는 소통의 장에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오며 의견의 경우의 수가 늘어만 가는 것. 정말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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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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