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신하는 인간들 사이에 섞이고 싶었던 남자 [도서/문학]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글 입력 2023.10.0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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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이 이렇게 웃긴 책인 줄 몰랐다.

 

 

이마도 평범, 이마의 주름도 평범, 눈썹도 평범, 눈도 평범, 코도 입도 턱도 ... 예컨대 내가 이 사진을 보고 나서 눈을 감는다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버렸다. (11p)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평범하다는 뜻이다.

 

 

구렁이 같은 얼굴의 까까머리 주인이 목을 흔들어 가며 능숙한 척 얼버무리며 초밥을 쥐던 모습도 눈앞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떠올라, 나중에도 전차 같은 데에서 어디서 본 얼굴인데 하며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뭐야, 그때 그 초밥집 주인 닮은 거구나 하고 ... 그때 그 초밥이 어지간히 맛이 없어서 저한테 추위와 고통을 느끼게 했는가 봅니다. (60p)

 

 

초밥이 대단히 맛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 빨리 좀 안 가주나. 편지라니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틀림없이 가갸거겨 따위를 긁적거리고 있을 게 뻔합니다. (57p)

 

 

자신의 방에서 부러 편지를 끄적이는 하숙집 딸이 귀찮다는 뜻이다.

 

익살을 떠는 것이 능숙하다는 설정의 주인공답게 수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에서 유머가 엿보인다. 특히 두 번째 수기를 읽고 있자면 주인공인 요조의 글을 읽고 몰래 웃음을 터트렸다는 선생님과 같은 표정이 된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자기혐오가 더욱 처절히 다가오는 듯 하다. 그는 한없이 우울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조는 사람들 앞에서 익살꾼을 자처한다. 밝고 친절한 그의 주변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속이 전부 곪은 요조와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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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책은 불신하는 인간들 사이에 섞이고 싶었던 한 남자의 수기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요조는 평생 남을 속여왔다.

 

바보처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어서 가족들을 웃기고,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갖고 싶지도 않은 사자춤 탈을 사달라고 요구한다. 어릴 적부터 익살스러웠던 성격과 작 중 몇 번이고 등장하는 '미남'이라는 묘사를 생각하면 겉보기엔 남들과 전혀 다를 것 없이 번듯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조의 그럴듯한 겉모습은 전부 꾸며낸 것이며 배고픔조차 모를 정도로 무감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 행복도 슬픔도 널뛰는 일 없이 그의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만이 자리 잡고 있다.

 

일례로, 어릴 적 아버지의 연설을 듣고 집에 돌아오던 일이 요조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개회사가 매우 형편없었다고 깎아내리던 아버지의 '동료들'은 요조의 집에 방문하여 오늘 밤의 연설회는 대성공이었다고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일반적인 처세술일 뿐이다. 그러나 요조는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27p)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남과 아무렇지 않게 섞여 살고자 했던 요조의 인생. 그야말로 고통만이 충만했던 것이다. 주인공은 평생 동안 인간을 짝사랑하며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


 

그러던 요조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요조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점이었다. 자살 시도 후 매일같이 술을 마셨던 그는 바 건너편에 있는 작은 담배 가게의 열일고여덟 정도 되는 요시코를 알게 된다.

 

어린 나이였던 요시코는 '처녀'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하지만 요조는 그녀의 순결함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때 묻지 않은 숭고함. 사람을 무한정으로 믿는 요시코에게 반한 그는 석양 아래서 청혼한다.

 

물론 일반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때 타버린 어른이 어린아이의 천진함에 가지는 경외심과 비슷했다. 인간을 불신하는 요조에게 '무구한 신뢰심'을 가진 요시코는 신화 속의 동물처럼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찬탄은 어느 사건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요시코가 겁탈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그녀가 지녔던 귀한 장점 때문에 능욕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장점이라는 것은 남편이 예전부터 동경하던 순결무구한 신뢰심이라는 한없이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

 

유일하게 믿었던 장점에조차 의혹을 품게 된 저는 더 이상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알코올에 손을 뻗칠 뿐이었습니다. (119p)

 

  

자신이 경외하던 장점으로 인해 몹쓸 꼴을 당하게 된 아내.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요조는 그토록 동경하던 '무구한 신뢰심'이 죄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평생에 걸쳐온 짝사랑이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에서 「인간 실격」이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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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일본 도쿄 긴자의 선술집 루팡에서 사진작가 하야시 다다히코가 찍은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가 평생 동안 겪었던 사건들을 허구화한 작품이다. 그는 부잣집 아이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가지고 자라왔으며,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 일생 동안 다섯 번의 자살 시도를 행하기도 했다.

 

모든 소설이 그렇다지만, 「인간 실격」에서 작가의 내밀한 심리를 엿볼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작가의 인생이 큰 영향을 차지한 소설에서 인간의 고뇌와 혐오와 나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고해와도 같은 수기를 읽으며 무엇을 느껴야 할까.

 

주인공인 요조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처세술에 부끄러움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요시코와 같은 순백의 도화지로 태어나지만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처세술에 능숙해 진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조가 평생 동안 남을 속이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듯이, 그의 속죄를 배울 필요가 있다. 적당한 사회성을 유지하되 그것에 당연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다자이 오사무가 무서워했던 '세상'에서 적당히 묻어가되 고결함을 잃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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