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원히 달라진 세상에서 -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

글 입력 2023.12.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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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클 때부터 나는 자유와 사랑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은 언제나 나를 자유롭지 못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왔다. 다만 나에게 약속해온 것은 자유와 사랑의 흔적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롭지 않은 것들이 흘리는 피는 너무나 선연한 붉은빛임을 알기에, 사랑이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 부족한 곳에 벌어지는 상흔이 너무나 깊고 넓음을 알기에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것이 내 글쓰기와 창작의 근간을 이뤄왔다 느낀다. 외면하지 않음은 곧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을 끝없이 서사화하는 것뿐이었다. 연극 <이런 들, 밤 가운데서>는 그런 나의 믿음에 함께 올라타 있다는 듯, 따뜻한 손을 맞잡아준 작품이었다.

 

 

포스터_최종.jpg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설유진 연출가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런 들, 밤 가운데서>는 사회적 상흔을 바라보는 동시대 예술인의 고찰이 담긴 작품이다. 우선 무대 구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연극은 둥근 무대를 관객이 둘러 앉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 무대 가운데 핀 조명 아래에 서는 배우가 발언권을 갖는데, 일상복을 입은 배우들이 관객 사이에 앉아 있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자연히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핀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가 내 이야기를 말하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모두 이 이야기에 일정한 지분을 지니고 있다는 선언처럼도 읽혔다. 더불어 이 공연이 지향하는 배리어컨셔스(존재하는 배리어를 없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방식)와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입고 있는 옷차림을 설명하고, 지문을 직접 발화해 읽고, 춤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어떤 조건의 관객들도 이 이야기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이끈다.


작품은 소란의 메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시 계간지에서 '나에게 랑사이 그랬고/ 너에게 애정이 그랬다'라는 구절을 발견한 소란은 '랑사이'가 '사랑이'의 오타인 것 같다는 메일을 쓴다. 이후 뉴스, 일기예보, 친구들 간의 대화, 누군가의 생생한 증언이 번갈아 가며 제시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서울동물원을 탈출한 뻐꾸기 '자유'와 앵무새 '사랑'이의 소식이다. 둘은 종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9년 뒤 앵무새 사랑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발화된다.

 

작품이 말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다. '자유'와 '사랑'이 날아가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떤 이는 과거 좋은 시절이 있었지 하며 회상에 머무를 것이고, 어떤 이는 둘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숲을 헤맬 것이고, 어떤 이는 그것이 존재했었는지도 잊어버릴 것이고, 어떤 이는 그들이 돌아올 자리를 비워둔 채 꾸역꾸역 살아갈 터다.

 

자유와 사랑이 그저 달아났을 뿐,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뒤집힌다. 이제 그것의 차가운 사체가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다.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그들이 완전히 죽어버린 세상을 애처롭게 인지한 자들만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사랑이의 종을 뛰어 넘은 사랑도 인상적이다. 수명이 다른 탓에 먼저 떠난 뻐꾸기 자유의 곁을 지키는 건 앵무새 사랑이다. 불가해한 일들이 끝없이 들이닥치는 세상에서, 매일 아침 참사로 인한 폐허를 마주해야 하는 세상에서 자유와 사랑은 서로에게 기대어 버티는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두 개념은 한 쪽의 죽음을 기꺼이 슬퍼하고 애도한다.

 

뉴스에서는 익숙한 날짜가 등장한다. 10월 29일, 4월 16일. 한국인의 마음 속에 트라우마로 새겨진 그 날짜들은 그저 어떤 평범한 하루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깊은 상흔으로 남았을 때, 우리는 문득 분노와 슬픔이 등을 맞댄 감정임을 깨닫는다.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그것을 피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바라본다.

 

참사 후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작품 속 어떤 이는 그저 그곳에 다시 방문해본다. 누군가의 울음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며, 차가운 두 손을 모아본다. 어떤 이는 이웃 할머니를 찾는다. 제대로 소통할 수 없더라도 끈질기게 깨끗한 마스크를, 제철 과일 가져다 주고 손짓 발짓으로 긍정을 표한다.

 

제대로 허리 숙여 인사하며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당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려고 한다. 자유와 사랑이 그랬듯, 서로의 사소한 정에 기대며 간간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떠오른다. 연극의 대사를 차용하자면, '삶이 떠난 곳에 네가 있'는 현실이.

 

결국 시인은 '사랑이'라는 말을 제대로 발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 죽은 자리에, 예전과 같이 그것이 있는 척 뻔뻔하게 시 사이에 끼워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죽었고, 달라졌다는 사실을 매섭게 포착한 시인은 삶이 떠난 곳에 네가 있듯, 사랑이 떠난 곳에 랑사이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오타를 지적하며 여전히 그때 그대로의 사랑은 살아 있다고 믿어볼 것인가. 답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12월 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다. 동시대 예술인들의 고민을 녹진히 담아낸 이 연극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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