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왜 슬퍼해야하는가 - 환상의 빛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8.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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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하여 파도는 해변을 오른다. 온 힘을 다하여 파도는 해변을 쓰다듬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파도는 부서져버리고, 거짓말처럼 해변에서 멀어진다. 다시 파도가 밀려들어온다. 쓰다듬고, 부서지다 밀려나기를 반복한다.

 

소설 <환상의 빛> 속 주인공인 ‘유미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인 ‘이쿠오’가 죽어버린 이후로 그녀의 삶은 파도 같은 질문이 채웠다. 대답 없는, 돌아보지 않는 그 뒷모습을 향해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건넸지만, 그 물음은 파도처럼 힘없이 부서져 그녀 안에서 맴돌았다. 다시 힘겹게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건 소금기가 묻어있는 흰 거품의 침묵뿐이었다.

 

우리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인 ‘미야모토 테루’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글프고 고독한 한 여자의 편지를 채워나갔다. 남편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의 무게는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일상을 무기력하게 비꿔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첫 감정은 씁쓸한 탄식이 아니라 아름다운 감동이다. 무력감이 짙은 서사를 다루면서도 결국엔 따스한 여진을 전하는 이 소설의 원동력은 바로 무엇일까.


영화 <밀양>을 보면 신애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녀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밀양까지 내려왔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아들을 잃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자 종교에 기대어 보지만 얄미운 신은 그녀보다 먼저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멋대로 용서해 버렸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겨우 마음을 다잡는가 싶었지만 우연이 마주친 유괴범의 딸을 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은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 삶의 틈 속으로 갑자기 끼어든 불행과 절망 앞에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며, 상처는 깊어져 짙은 흉터를 남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레 시간에 기댄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상처가 아물기를, 혹은 통증이 무뎌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흉터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는 떠난 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그런 의미에서 80여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유미코의 편지는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멋대로 죽어버린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마음의 정체를 알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래서일까. 다미오씨와 재혼 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전 남편이 죽었던 7년 전의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이쿠오의 그림자를 이고 가는 듯했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 유미코도 결국 답을 얻긴 했다. 그러나 그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 혹은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라는 차라리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애매모호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우리는 그녀가 이후에도 이쿠오를 잊고 살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독자들의 그러한 예감은 여전히 남편에게 말을 거는 유미코의 행위로 증명된다.

 

아마도 그녀는 이후로도 가끔씩 이쿠오(전 남편)라는 상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이다. 허나 그것을 마냥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고귀한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유미코는 이쿠오의 빈자리를 편지를 쓰는 것으로 메웠다. 남편을 따라간다는 선택지 대신 편지를 쓰며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 노력이 한데 모여 유미코의 삶을 지탱했다.

 

다시 말해 <환상의 빛>은 유미코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이쿠오를 문득문득 떠올렸듯이, 포개어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외면한 것들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파도는 최선을 다해 해변으로 밀려 들어오고, 그것을 쓰다듬다 부서지며, 멀어진다. 그 과정에서 해변은 파도가 몰아온 모래들로 단단히 쌓여간다. 그러고 보니 유미코는 소설 속에서 과묵한 그녀의 남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위태롭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삶이란 불확실한 것들의 연속이다. 때문에 우리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운에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대답 없는 질문들은 단단한 삶을 이룬다. 우리는 왜 슬퍼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며, 그것이야 말로 우리 삶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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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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