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때 그 새를 찾습니다 [동물]

생각보다 똑똑한 새들
글 입력 2024.01.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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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새대가리'라는 표현이 있다지만, 사실 새는 꽤나 똑똑하다. 대표적으로는 까마귀가 그렇다. 까마귀는 시커멓고, 울음소리도 흉흉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꺼려져 왔다. 당장 우리나라에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이 괜히 생기진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서양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운다고 해서 까마귀를 소름 끼치는 동물로 여겼다. 반짝이는 것을 모으는 습성 탓에 이것저것 훔쳐 가는 도둑의 이미지도 있고, 죽음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몸뚱이 때문에 검은 고양이와 함께 불길함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에드거 앨런 포의 시, '갈까마귀'다. 여기서 까마귀는 죽음과 절망의 상징물이다. 자신의 죽은 연인 '레노어'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그 이름을 부르짖는 화자 앞에 나타난 까마귀는, 그 어떤 간청에도 '영영 없으리'로만 답한다.


창문 밖 기척을 느낀 화자는 연인이 귀신으로라도 나타날 것을 기대했건만,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까마귀이었으니 대단히 실망했을 것이다. 화자는 이 까마귀를, 그저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게 뻔하다며 말 그대로 '새대가리' 취급한다.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까마귀가 제시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화자의 관점에서 까마귀는 '자신의 심장을 쪼는 부리'를 가진 야속한 존재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하듯, '영영 없으리'를 반복하는 까마귀의 모습에서 나는 그와 대비되는 위로를 느꼈다.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끔 '어떻게든 되겠지' 대신 '사실 할 수 없었다'를 받아들여야 하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까마귀가 특히 지혜로운 새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까마귀가 지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과 친해진 까마귀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고, 사람 곁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거둬준 사람을 볼 때의 까마귀의 눈은 어두운 몸과는 대비되게 반짝반짝 빛났다. 인간의 반려로써 더욱 친근한 개와 고양이와 비교하면 저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이렇듯 새들도 그들 나름대로 애정을 표하고 있다.

 

 

 

제가 찾는 새는요


     

교감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사실 나에게도 새와의 추억이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의 일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파트 내 놀이터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던 풍경 가운데, 물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바닥 위로 웅크려 있는 새 한 마리가 보였다. 가로등 빛 아래 보이는 새는 비둘기보다 조금 더 통통했고, 깃털은 연한 갈색에 검은 무늬였다.


그 이름 모를 새를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정수리에 움푹 팬 상처가 나 있었다. 비 때문에 깃털은 다 젖어 있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보통 새는 사람이 다가오면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그럴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간 나는 네모난 용기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빠의 도움을 받아 새를 그 안에 옮기고, 안으로 들였다. 나는 새를 잘 몰랐고, 키워보기는커녕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상처에다 사람이 쓰는 후시딘을 발라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깃털을 말려주고, 기운 나면 먹으라고 쌀 조금을 같이 넣어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베란다에서 짹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와 같은 새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우렁찬 울음소리였다. 머리의 상처는 딱지가 앉았는지 조금 아물어 있었고,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언제 아팠냐는 듯 활기찬 모습이 허무하면서도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우리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그 새는 놀랍도록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 새를 봤던 장소, 놀이터 쪽 풀밭에 놓아주자마자 몇 번 통통 걷더니만 단박에 날갯짓해 하늘로 사라졌다. 이별은 만남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당연히 그때 이후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도시의 새들은 비둘기며 참새며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고, 야생의 새들은 보통 저만치에서 저들끼리 노닐기 바빴다. 나를 찾아왔다기보다는 내가 찾아낸 거지만, 잠깐이라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아직 그 새가 유일하다. 그래서 꽤 오래전의 일인데도 나는 가끔 그 새에 대해 생각한다.


또 좀 우스운 생각이지만, 그 새도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한다. 물론 은혜 갚은 까치 같은 상황을 바라는 건 아니다. 보답 같은 걸 기대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기도 했고. 그저 그때의 일이 나에게 특별했던 만큼, 그 새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하는, 일종의 오만이다.


그러니 그냥 공짜로 밥 준 사람, 또는 공짜로 재워준 사람 정도로 기억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잠깐이나마 만나게 된 것도 일종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해 버리면 재밌으니까. 살면서 한 번 더 마주치는 일이 없어도, 이미 내가 있는 곳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 해도. 잠시간 곁을 허락해 준 그 이름 모를 새에게 만날 수 있어 고마웠다고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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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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