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solo album] track14.

글 입력 2024.06.0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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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by Yang EJ (양이제)]

 

 

[NOW PLAYING: Whip It - DEVO]

 

지금까지 저는 인물 밖에서 갈등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외적 갈등에 인물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지켜보았는데 이는 캐릭터를 알아가는 과정일 뿐, 이야기라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인물에게 갈등을 제시하면 인물은 각자의 개성에 어울리는 응답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연속성과 연쇄작용이 없는 단답형이었죠. 이는 이야기보단 좁은 케이지 속에 인물들을 가두고 변수를 넣어가며 진행한 실험에 가까웠습니다.

 

눈사람, 깡통, 오뚝이 인형. 이 세 가지 물체를 정렬해 보겠습니다. 물건은 모두 햇빛이 드리운 어느 탁자 위에 놓여있습니다. 먼저, 눈사람을 살펴볼까요. 눈사람은 따뜻한 햇빛이라는 주변 환경으로 인해 이미 몸이 완전히 녹아있습니다. 원래의 형태를 잃고 그저 맑은 웅덩이가 되어 고요히 반짝이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도요. 그렇다면, 바로 옆에 위치한 깡통을 살펴보겠습니다. 깡통은 햇빛에 끄떡도 하지 않고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상온의 공기에 녹아내릴 만큼 부실하지 않습니다. 이 깡통을 향해 한번 손가락을 튕겨보겠습니다. 퉁. 퉁. 깡통은 손톱이 닿는 자리마다 찌그러지며 제각기 무늬를 만들다가 이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쓰러진 깡통은 잠시간 좌우로 몸을 뒹굴더니 이후 완전히 정지했습니다. 이제 저는 웅덩이와 깡통을 지나 오뚝이 인형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오뚝이 인형은 이 사달이 나는 동안 녹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반듯하게 서 있습니다. 다시금 저는 오뚝이 인형을 향해 손가락을 튕겨봅니다. 맥없이 쓰러져 모든 움직임을 멈춘 깡통과 달리, 오뚝이 인형은 제가 주는 충격을 버티며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제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면 힘의 방향 그대로 순순히 눕는 것 같다가도, 이내 반대편으로 돌아와 우뚝 자세를 바로잡습니다. 별달리 손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녹아버린 눈사람과 제 손가락 힘에 순순히 쓰러져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빈 깡통과 다릅니다. 오뚝이 인형은 외부 충격에 저항합니다. 반응행동을 할 줄 아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 한들 오뚝이 인형이 '사람다워질' 수 있을까요?

 

세 개의 물체는 제가 각각 '자연히 무너짐', '힘을 가했을 때 무너짐', '힘을 가했을 때 대항함'이란 특징에 맞게 임의로 선정한 물체입니다. 그러나 이 셋 모두 외부의 자극에 반응만 할 뿐,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물은 제가 갈등을 제시해 주었을 때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응답을 내주었으나, 갈등의 공급을 끊어버리면 행동도 이야기도 멈춰버렸습니다. 그러니 여태까지의 인물들은 잘해봤자 '오뚝이 인형'이었지요. 오로지 건드릴 때만 반응한다는 것은 외부의 힘이 없다면 영원히 부동이라는 뜻이니까요.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답지 않은 인물은 매력이 없죠.

 

눈사람, 깡통, 오뚝이 인형에 이어 네 번째 물체로 로봇청소기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로봇청소기는 시작 버튼을 누르면(혹은 타이머에 설정한 시간이 다가오면)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손수 닦아낸 것처럼 완벽한 청소를 수행하겠다'란 존재 이유에 충실하게 로봇청소기는 구석구석 바쁘게 이동합니다. 청소기는 이동 중 장애물에 가로막히자, 경로를 재설정하고 몸을 피하는 융통성도 보입니다. 방전되지 않도록 꾸준히 충전시키고, 작동을 위해 버튼을 눌러주는 조금의 수고로운 과정만 거친다면 청소기는 스스로 움직이며 행동합니다. 재밌는 점은 인간과 닮지 않은 형태임에도 사람들은 청소기에 이름을 붙이거나 애정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로봇청소기가 고장이 나면 허전함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사례도 있지요. 외형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동한다는 '능동성'이 사람에게 애정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비록 그게 명령 입력이 필요한 반쪽짜리 능동성일지라도요.

 

외부의 갈등에 대응만 하는 것은 인물을 꼭두각시처럼 만듭니다. 지푸라기로 엮은 것이든, 실제 사람의 키와 흡사한 정교한 밀랍인형이든 인공적이 느낌이 강하면 사람들은 '사물'로 인식하지요. 하지만 겉모습과 상관없이 물체가 능동성을 가진다면 사람은 그를 애정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때로는 물체의 행동에 괜히 이야기를 불어넣기도 하죠. 가령 충전이 끝난 로봇청소기가 가득 찬 전력을 동력 삼아 활발히 움직이는 걸 보며 "씩씩하네", "기분이 좋아 보여", "방금 밥 다 먹고 신났나 봐"라고 감상을 흘리는 것처럼요. 물체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무대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입하며 상상력을 불어넣죠. 가만히 앉아 갈등이 오길 기다리기보다 직접 갈등을 만들어 나갈 줄 아는 인물이 이야기를 거머쥘 자격을 얻는 겁니다.

 

 

 

양은정 에디터태그.jpg

 

 

[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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