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판단이 맞다는 오만함과 멍청함 [만화]

글 입력 2023.11.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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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웹툰 <똑 닮은 딸>에 대한

거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엄마의 힘은 대단하다. 제 뼈의 온갖 좋은 것들은 뱃속의 생명에게 내어주고, 출산 후에도 제 젖을 물려가며 아이를 키운다. 엄마는 희생의 아이콘이자 그 어떤 여성보다 신성한 존재다. 그렇기에 엄마를 욕되게 하는 것은 대단한 패륜으로 여겨진다.

 

엄마의 힘은 대단하다. 한 인간을 키워내는 데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이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코끼리가 쇠사슬을 끊어낼 수 없듯이, 유년 시절의 권력에 대한 지배를 경험한 인간은 복종과 자기 괄시로 적응한다. 엄마는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소명은 엄마와 아빠, 남동생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인구학적으로 본다면 평범한 이 가족은 사실 평범하지 않다. 사회적으론 능력 좋고 완벽한 엄마 덕에 아주아주 돈이 많은 유복한 집안이다. 그러나 가정 내적으로는 아빠는 실종되고 남동생은 사고사한 불운한 가족이다.

 

홀로 남은 소명은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소명은 그 ‘완벽한’ 엄마가, 아빠와 남동생을 죽인 살인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명의 엄마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완벽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의 힘이 아닌 권력의 힘을 이용해 자식들을 굴종시키고 자신의 감시하에 두었다. 늘 자신이 가장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라 생각했으며 그런 자신을 닮은 유일한 딸, 소명을 끔찍이 아끼고 통제했다.

 

그래서 지금 소명의 삶의 목표는 복수다. 칼끝은 제 엄마를 향하여 있다. 지금 소명은, 엄마의 감시에서 벗어나 동생 명진의 죽음을 다시 파헤치고 엄마의 비밀을 끄집어내는 것만을 바라보는 경주마다. 그 외의 것들은 보이지 않거나, 볼 수 없게 스스로 눈을 가리고 돌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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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텍스트로만 보면 어떤가? 소명이 괜한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그래도 제 엄마에게 복수라니. 완벽히 이해되기 보다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솟아난다. 

 

바로 그 점에서 소명은 늘 외롭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심지어 명진의 죽음도 함께 겪은 소꿉친구 시윤까지도 끝내 소명을 의심한다.


그리고 소명의 엄마는 이 점을 가장 잘 악용하는 똑똑한 엄마였다.

 

좋은 엄마를 그저 의심하는 예민한 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너. 

 

전형적인 정신적 지배(가스라이팅)를 행사하며 소명을 찬찬히 무너뜨린다. 소명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유일한 친구이자 조력자였던 시윤과의 관계에 결정적 균열을 만든다. 시윤과 소명에게 각각 서로를 향한 의심을 심어둠으로써, 소명은 시윤과 멀어지고 그렇게 완벽한 혼자가 된다. 엄마 자신이 아니고서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개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소명의 주변에 거슬리는 인간을 하나씩 치워가고 소명의 중학교 친구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한다.

 

*

 

여기까지는 <똑 닮은 딸>의 1부 스토리다. 하지만 이 웹툰은 이 뒤의 에피소드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2부는 소명이 ‘류솔’이라는 캐릭터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류솔은 집에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고 사진이라는 취미에 극도로 몰입하는 모습에 반해 소명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소명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반복되자 소명은 류솔을 사지로 몰아 통제하려 하고 정상적인 우정과는 궤를 달리하는 관계로 악화한다.

 

류솔과 소명의 끝은 결국 살인이었다. 남자친구와의 다툼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류솔은 경찰에 자수하고 소명과는 절교해 새로운 삶을 살겠다 선포했지만, 소명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류솔을 죽여버린다.

 

류솔을 죽여버린다니, 주인공 소명이가?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과 아들을 죽인 제 엄마를 닮아가는구나. 그래서 제목이 <똑 닮은 딸>이었구나, 싶었을 찰나. 사실 이 고등학생 소녀는 소명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이 소녀는 과거 소명의 또래였을 시절의 소명 엄마, 소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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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솔과의 에피소드는 소명 엄마(이하 소민)의 과거 자신뿐만. 독자들은 그제야 우리 뇌의 멍청함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류솔과의 자신뿐만 소명(이라고 믿어온)이 통제적이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래도 소명 엄마와의 다른 점’들을 애써 찾아왔기 때문이다. 소민과 소명은 이러이러한 점에서 다르다, 소명이는 소민과 닮았지만 그래도 저런 부분들에서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등의 자기 합리화를 내내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심 피어나는 의심은 못 본 체 해오며 우리의 주인공의 화려한 복수를 응원해왔다. 

 

자신이 사실 응원해오던 인물이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

 

<똑 닮은 딸>은 정신적 지배 그 자체인 웹툰이라 표현하겠다. 단순히 딸을 지배하는 엄마를 소재로 한다는 점을 넘어서, ‘이담’ 작가는 소민과 정말 똑 닮았다. (이것은 스릴러 장르 웹툰 작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독자들은 80화에 달하는, 연수로 치면 대략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신적 지배를 하는 캐릭터를 보면서 되려 제가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민을 소명이라 믿으며 확증 편향에 갇혀있던 나에게 작가는, ‘너의 판단은 과연 옳았니?’라는 질문을 던져버린다. 그것도 넌지시 묻는 게 아니라, 아주아주 충격적이고 단발적이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너의 판단은 과연 옳았니?’가 아니라, ‘봐. 네가 틀렸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나는 내 비합리성을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어났는지, 내가 소민을 이해하려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게 되면 내 모순이 섬뜩하고 우스워진다. 정말 작가에게 정신적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스토리는 교묘했고 장치는 치밀했으며 까발려진 사실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서술 트릭이었다.

 

좋은 스토리란 정신적 지배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 그를 두둔하거나 경시하려는 의도는 아님을 밝힌다. 다만 좋은 스토리란 그런 교활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토리는 너무나 당연히도, 선택권이 박탈된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전지적 절대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위치에 독자는 세워지니까. 작가가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특정 캐릭터에 대한 내 생각, 내 ‘인식’이 생긴다. 그리고 그 ‘인식’은 곧 편향이 되어 선한 캐릭터의 악행에는 눈 돌리고, 악한 캐릭터의 개전에는 의구를 품는다.

 

그리고 그 편향이 스토리에 대한 몰입을 만든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내 편을 만들고 아군을 응원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미워할 적군이 생길수록 아군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은 강해져서 끔찍이 전체에 대한 몰입도를 만든다. 마치 내가 작품 속 한 인물인 것처럼, 소명을 정당화하고 선역들을 감싸면서 소민을 비롯한 많은 악역을 미워했듯이.

 

작품 속 소민은 몰입하는 인간에 끌림을 느꼈다. 사진에 몰입하는 인간, 악기에 몰입하는 인간, 하다못해 자신에 대한 복수에 몰입하는 인간. 언제나 완벽한 계획에 맞추어 살아가는 기계 같은 소민은 가지지 못한, 의욕이나 목표 같은 것이 뚜렷한 사람을 원했다.

 

이담 작가는 수많은 독자를 소민으로부터 살려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작품에 몰입한 적이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과 언어폭력, 정서적 학대는 나까지도 두통을 앓게 하였다. 또다시 <똑 닮은 딸> 정주행을 마친 지금의 나를 소민이 만난다면, 류솔에게 느꼈을 감정을 나에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이담 작가, 그는 만화의 신이다. 소름 돋는 연출과 숨 막히는 서스펜스를 만화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똑 닮은 딸>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단언컨대 전혀 새로운 만화적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박상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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