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편한 진실 마주하기 [도서/문학]

자신이 살기 위해 첫사랑을 낙원으로 삼은 한 사람의 인생
글 입력 2023.07.2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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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하는, 알고 싶지 않았던 세계


 

나는 가끔 내 세상이 완전무결하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적당히 속상하고, 적당히 화가 나고, 또 적당히 기쁘다. 때때로 내 감정의 한계선을 넘는 고난과 기쁨이 찾아오지만, 내 존엄성을 흔들 정도는 아니다. 덕분에 내 세상은 적당하고 안온하다. 내가 평화로우니 내가 사는 세상 또한 평화롭지 않겠냐며 합리화한다. 그렇게 나는 사각지대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못 본 척 해왔다. 


이 책을 친구에게 추천받은 지 2년이 다 되어서야 완독한 것도 외면의 산물이다. 부끄럽지만 무서웠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 게 내가 안전하다고 믿는 세상을 스스로 깨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동안 내가 위선적으로 살아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좋다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면서, 팡쓰치 같은 사람들을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팡쓰치가 누군가?' '누구이기에  서두에서부터 고해성사하고 있는가?'. 이제부터 팡쓰치를 소개하겠다.

 

 

 

팡쓰치에 대하여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얼핏 보면 두근거리는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책이 아닐까 싶다. 비극적이게도 이 책은 피해자, 아니 생존자의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다. 팡쓰치는 13살에 만난 문학 선생님, 리궈화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다. 


18살까지 리궈화와 사회로부터 성폭력, 가스라이팅, 외면, 방관당하다가 18살에 결국 실성한다. 번호를 묻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외모, 비싼 아파트를 소유하는 돈 많은 부모님, 평균 수준을 훨씬 넘는 문학 지식, 영혼의 쌍둥이 같은 동갑내기 친구. 팡쓰치를 둘러싼 모든 배경은 완벽해 보인다. 


문학을 좋아하는 팡쓰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문학 선생님 리궈화를 동경했다. 리궈화는 쓰치와 쓰치의 단짝 이팅의 작문 선생님을 자처한다. 그렇게 두 학생의 1:1 작문 수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쓰치는 첫 수업 날 리궈화로부터 성폭행당한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는 동경과 사랑을 구분해 내기에 충분치 못하다.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리궈화는 '너도 날 좋아하잖니'라며 막무가내로 쓰치를 취했다. 


그렇게 쓰치는 자신이 리궈화를 사랑하는 건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빼앗겼다. 현실을 부정하다 끝내 쓰치는 리궈화를 정말 사랑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리궈화와 끝까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견뎌낼 수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쓰치가 실성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허구와 현실의 차이


 

영화나 드라마라면, 궁지에 몰렸던 과거를 청산하고, 악인을 무찌르고, 피해자가 당당해지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차갑다. 현실은 자의적으로 서사를 꾸며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면, 날 것 그대로 끔찍함이 이어진다. 


자아가 형성되고 풍부해지는 시기에 쓰치는 자아를 거세당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피해자라면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결국 쓰치는 자신을 놓아버리는 선택을 했다. 쓰치가 쓴 일기장에는 리궈화로부터 당한 정신적 고통이 담겨 있다. 하지만 물질적 증거가 담겨 있진 않다. 따라서 리궈화를 고소하지도 못했다. 주위 사람들을 쓰치가 어린 나이에 문학을 많이 읽어서 실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리궈화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아파트 주민들과 잘 지낸다. 쓰치와 친했던 이원과 이팅은 뒤늦게 쓰치의 상황을 알게 돼 죄책감과 분노에 휩싸인다. 팡쓰치 소설의 기반이 되는 실제 사건 속 선생도 증거 불충분으로 불구속 기소됐다고 한다. 단순히 성폭행 피해 사실을 넘어 존엄성과 정신이 무너지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불평등하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을 벌 받는다'는 것인데, 현실은 아닌가 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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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


 

어렸을 때 우리는 모래성이 무너뜨리기 위해, 삽으로 모래를 몇 번이고 퍼냈다. 어떤 삽들이 쓰치의 무너짐에 일조했을까.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궈화와 타지역 여행을 흔쾌히 허락하는 부모에게 쓰치가 '우리 집은 성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하니 부모는 '성교육은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건데 우리는 아니잖나' 하고 무시한다. 


이팅에게 리궈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이팅은 '더러워, 리궈화에게 아내와 딸이 있는 것도 알면서!'라고 꾸짖는다. 쓰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궈화가 제2, 3의 쓰치를 만나는 학원에는 직접 여학생을 리궈화 집에 데려다주는 관리 선생이 있다. 리궈화에게 강간당하고 버림받는 또 다른 학생이 인터넷에 폭로 글을 올리자 더러운 건 너라며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있다. 


리궈화는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 간 사랑을 보는 사회의 시선을 이용한다. 어차피 사람들은 여자가 돈 밝히는 더러운 인간 취급을 하니 마음이 편하다. 불륜을 들켜 화를 내는 아내에게 학생이 자신을 유혹했다며 욕하기도 했다. 대만 사회가, 아니 온 세상이 리궈화와 제2, 3의 리궈화를 돕고 있다.

 

 

 

저자의 당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존엄은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책을 읽으며 그 문구를 새기고 또 새겼다. 예전에 나는 가끔 유튜브나 혹은 건너 건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 사례를 들으면, '나이 많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쓰레기지만 같이 사귀어 주는 사람도 똑같은 거 아니야?'라고 반응했다. 부끄럽다. 


정확히 어떤 상황으로 두 관계가 형성됐는지 모르면서 마치 그 두 사람 관계를 통달한 듯 평가내렸다. 피해자를 두고 평가내리는 말이 나 자신에게는 한 마디에 불과하지만, 당사자에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큰 화살로 다가간다. 


피해자의 고통에 내 말 한마디는 너무 작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크기와 상관없이 고통에 일조했다면 동조자다. 이 책의 저자는 출간 후기에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책 앞머리에 '실화를 바탕으로 쓰다'라고 쓴 것은 독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길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단락이 나왔을 때 그런 고통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책장을 덮고 책을 내려놓으면 '아, 실제가 아니라 소설이라 다행이야'라고 말하지 않길 바랍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 책을 내려놓지 말길 바랍니다. 작가인 나처럼 여러분도 쓰치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공감해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녀 편에 써주길 바랍니다.
 

 

 

이 책의 숨겨진 비밀


 

사실 이 책은 저자, 린이한의 실제 경험을 각색한 내용이다. 린이한은 입시에서 전국 1등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장기적으로 성폭행을 당해 우울증을 앓아왔다. 고통을 해소하고 또 다른 팡쓰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이 책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린이한은 결혼식 당일에도 울면서 이 책을 쓸 정도로 책 완성에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출간 2달 후 린이한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 이후 책이 린이한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책 마지막에 수록된 서평에 '과연 린이한이 처음부터 본인 경험이라는 걸 밝혔을 때 사회가 린이한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까'라는 자조적인 의견이 있었다. 충분히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성범죄 관련 사회 뉴스를 보며 '꽃뱀이 잘못했다'는 댓글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외면을 외면하기


 

책을 다 완독한 소감은 '또 다른 팡쓰치를 마주하는 용기를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언제든 마주할 준비를 해야겠다. 외면은 내 세상을 완전무결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또 다른 균열을 만들어 낼 뿐이다. 


불편한 진실. 사회에는 수없이 많은 불편한 진실이 존재한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증언,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증언 등. 특권층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불안정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혹은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두 눈 부릅뜨고 보면서 가해자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피해자의 곁에는 사회라는 지원군들이 있으니, 빠져나갈 생각일랑 말라고. 그렇기 위해서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팡쓰치를 돕는 첫 단계다. 끝으로, 이원이 이팅에게 쓰치를 돕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사로 이번 독서 기록을 마치겠다.

 

 

넌 아직 열여덟 살이야.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중략..)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겪고, 쓰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도 있어. 너희가 태어나서 함께 지낸 시간들과 네가 쓰치의 일기에서 찾아낸 시간들을 모두 합쳐서 말이야. 


(..중략..)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해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중략..) 넌 선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동사들처럼 내려놓을 수도 있고, 뛰어넘을 수 있고, 벗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넌 그걸 기억할 수도있어. 세상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중략..)쓰치는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 - 나를 포함해서 -을 대신해서 그 모든 걸 감당했던 거야. 이팅, 네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걸 영원히 잊어선 안돼. 


(..중략..)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319~322페이지, 이원이 이팅을 위로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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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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