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용의 아이로부터 온 메시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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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Ca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아래의 문장이 나온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는 역사가 과거의 역사관과 현재의 역사관 사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는 오랜 시간에 걸쳐 권력의 크기나 방향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수정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과적으로 역사가의 시선을 통해 재편성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배우고, 그 점을 토대로 발전하고자 하는 태도는 구태여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인간의 DNA 속에 이러한 태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과거를 밑거름 삼아 실패 없는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된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 보자면, 역사는 이긴 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이다. 진 자는 말이 없거나, 의도와는 다르게 쓰여진다. 이처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 세상에도 일부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입장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관점이나 문화권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는 것이 당연하다. 여러 기준 중에서도 당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권력자들에 의해 남겨진 역사가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 주목했다. 권력에 의해 쓰여지고 또 버려지는 이야기 말이다.
권력은 '남을 자기 의사에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뜻한다. 남을 자기 의사에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권력의 속성이 사회적 관계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꼭 공인되지 않은 힘이더라도, 어느 집단에나 구성원 간의 권력 차이가 존재함을 일상생활을 하면서 몸소 깨닫게 된다.
이처럼 권력은 어디에나 있는 존재다. 또한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 한 번 맛 본 사람은 쉽게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추측컨데, 권력은 본격적으로 군집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중요성이 점차 대두됐을 것이다. 농경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최근까지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죽인 자가 힘의 피라미드에서 꼭대기를 차지하는 게 인간 세상의 일상이었으니까.
연극 <용의 아이> 집필과 연출을 맡은 극단 혈우의 한민규 대표도 아마 이런 점에 주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고려 말기 인물의 이야기를 빌려, 고전의 가치 전달과 현대 사회에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용의 아이
세상이 흉흉해질 때, 영웅 신화는 더욱 주목 받는다. 변화의 여지가 없는 세상에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기 때문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신적인 존재를 기다리는 마음이 투영된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연극 <용의 아이>는 김통정 설화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창작극이다. 혼란스럽던 고려 말기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김통정은 고려 말기 인물로, 제주에서 삼별초 항쟁을 이끈 실존 인물 중 하나다. 제주도 설화로도 이어져 내려오는 김통정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영화 그 자체다.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기괴한 형상으로 태어나, 제주를 구하는 영웅이 된 사람이라니! 박혁거세가 떠오르는 탄생 신화부터, 힘없는 자들 편에 서서 끝까지 항쟁하는 올곧은 모습은 누구라도 본받을 점이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고려를 위해 싸워왔지만 고려로부터 버려진 삼별초!
왜 정치의 흐름에 희생되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약자들일까.”
<용의 아이>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약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극의 배경이 되는 때는 불신과 음모가 만연한 '칼의 시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일에, 사회적 약자인 죄없는 백성까지 피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넘어설 수 없는 어떤 견고한 벽, 부당함, 착취, 반복되는 좌절로부터 생겨난 무기력함. 이 모든 것은 약자라면 사회에서 겪는 일들을 설명하는 단어다. 인간에게 힘이라는 것이 부여될 때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는 강자와 약자라는 자리. 그렇다면 약자는 언제나 약자여야만 하는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함께 하는 길을 모색할 수는 없을까? 연극 <용의 아이>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갖고 태어났다.
과거와 오늘을 연결짓다
극단 혈우의 대표 한민규 연출이 쓴 글이 인상 깊어, 글과 함께 <용의 아이>에서 인상 깊었던 지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시대적 사건, 시대적 인물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 현상에 관통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
신분제는 폐지 되었지만, 여전히 계층 간 갈등은 존재하며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오늘날 계층은 경제적 수준이나 주류・비주류와 같은 기준으로 나누며,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띄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극은 '대혼란의 시대' 고려 말기 중심에 있던 삼별초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다.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에서 만들어진 특수군으로, 무신정권 후반에는 무인들과 대립하는 집단이다. 자신의 근간이 되는 집단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세상의 법도를 그르치고 결과론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배신과 배반을 일삼는 행태에 격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삼별초에서 활발히 활동한 김통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극단 혈우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삼별초 김통정과 왕실의 인물 김방경, 대립되는 두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다음과 같은 게 아닐까?
단순히 선과 악을 구분짓는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권력이 언제든 옮겨 갈 수 있고 잘못 쓰인 권력으로 인해 나타나는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았던 시대에 폭력은 필수불가결했겠지만, 삼별초 제거를 위해 세운 규율을 깨뜨릴 수 없다는 집념 하나로 자기 자식까지 죽일만큼 복수 앞에 철저히 냉혈한인 김방경 또한 무신 정권으로 피해를 본 인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 될 수도 있다. 무조건 극 중 다양한 등장인물과 각각 얽힌 사연은 삶의 축소판으로서의 기능을혼란스러운 사회일수록,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없어져 가는 인간애의 가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정적인 결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인 것은 인권과 인류애의 문제일 것이다. 존재 자체로 고귀하고 존중 받아야 마땅할 인간은 여러 가지 잣대 앞에 무너지고 있다. 이타심이나 배려 같은 단어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세상에서 ‘돈이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결코 이상하지 않게 들린다. 인간이 만든 사회에 정작 인간이 설 곳은 줄어들고 있는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인류애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다.
황금만능주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이므로 결과지향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인생은 결과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수도 없이 많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 보기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많은 성공과 부를 이뤘느냐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의 발자취를 살펴 보아야 한다.
고려 말기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힘없는 사람을 약탈하고, 부를 축적해 권력을 잡는 행위는 결국 멸망에 이르는 길을 택한 것과 다름 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하는 마음은 고작 돈 따위로 환원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다. 인간이 만든 물질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탐욕을 낳는다. 만약 탐욕을 계속해서 좇게 된다면, 인간이 설 자리는 결국 사라지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가진게 많아도 공허하기만 한 세상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착취와 싸움이 아닌, 죽어가는 이 땅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더 좋은 방식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할 지는 당신의 몫이겠지만, 개인의 선택이 모여 사회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다.
3. 지속가능성을 잃은 오늘로부터 그려지는 미래
고려의 이야기를 빌려와, 지속가능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현대의 모습을 극적으로 풀어낸 <용의 아이>. 종국에는 맞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을 장면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관객들.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는 주인공과 지속가능성을 잃어버린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 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 현실을 떠올려보게 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사회적 약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같은 크기로 행복하거나 무언가를 가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정신만큼은 모두에게 깃든 세상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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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대형 뮤지컬 같은 같은 압도적인 공연에 넋을 잃고 봤던 기억이 난다. 특히 ‘미래담론적 무협활극’이라는 설명에 걸맞은 화려한 액션과 유려하면서도 신선한 전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공연 당시 무대의 오른쪽에 앉았는데, 오른쪽에서 효과음이나 용의 음성 등, 다양한 소리를 현장에서 배우가 직접 만들어내는 것 또한 재밌었다.
기억에 남는 등장인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자'라는 캐릭터다. 모든 배우들이 1인분의 역할 이상을 해내어 완성도 높은 극을 만들었지만, '사자'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환상적으로 소화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특히 노래를 부르며 관객석 가까이 오는 동선이 많아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지는 카리스마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기울어가는 세상에서 공생을 원하는 괴물과 정반대의 입장인 인간의 이야기. 물론 갈등 없는 세상은 없지만, 결국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공생” 뿐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 제목처럼 건설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을 당시의 사회와 오늘날 사회가 대화하듯 표현하여, “공생”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톺아볼 기회를 선사한 <용의 아이>. 앞으로 극단 혈우가 걸어갈 날들이 기대된다.
[강윤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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