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토 토메 교회 전경
지난 편에서는 톨레도 풍경을 화폭 위에 옮기며 톨레도 시민의 자부심을 함께 불어넣었던 엘 그레코의 <톨레도 전경과 지도 View and Plan of Toledo>(1608)를 감상했다. 이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또 다른 엘 그레코의 그림 한 점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엘 그레코 미술관과 불과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é)는 톨레도 대성당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안에는 엘 그레코의 대표작인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1586)이 자리하고 있다. 한해에 수많은 관광객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산토 토메 교회를 찾는다. 이와 더불어 교회 건물 외관도 매력적이다.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문화를 적절히 섞어놓은 듯한 도시의 분위기에 걸맞게 산토 토메 교회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채 교회로 쓰고 있으므로 안과 밖을 비교하면 독특한 이질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1586)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산토 토메 교회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The Burial of the Count of Orgaz>(1586)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커다란 크기와 눈높이보다 위에 걸린 그림이 마치 관람객를 압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생하게 묘사된 인물들과 동작은 우리가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일부가 되어 실시간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어떤 장면을 묘사한 것일까?

(세부)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산토 토메 교회
그림의 주제는 산토 토메 교회의 후원자였던 오르가즈 백작의 1323년 장례식이다. 위 그림의 세부를 보면 축 늘어진 한 남성이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무덤에 누여지고 있는데, 이 남자가 바로 오르가즈 백작이다. 그리고 그 양쪽에 화려한 복장을 입은 두 성인, 성 스테파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르가즈 백작을 부축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많은 후원을 했던 오르가즈 백작의 선행에 대해 보답하듯 두 성인이 장례식에 나타나 그를 무덤에 눕히고 있다. 그리고 성인의 양쪽으로 등을 보이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사람들은 그림에 공간감을 부여하기 위해 화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부)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산토 토메 교회
두 성인이 백작을 무덤에 누이는 장면 왼쪽에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로 추정된다. 소년은 장례 장면을 가리키며 마치 감상자들을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 이렇게 그림의 주요 장면을 가리키는 제스처는 전통적으로 종교화에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관람자가 주목해야 할 종교적 교훈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 왔다. 화가는 소년의 가리키는 손가락을 통해 생전 많은 선행을 배푼 오르가즈 백작의 노력이 결국 보답받는다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세부)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산토 토메 교회
하지만 이 그림이 톨레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례 장면 뒤로 검은 상복을 입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게 집중해보자. 개개인의 얼굴이 전부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래를 보는 사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하게 묘사된 인물은 톨레도에서 명망 있는 시민들의 초상화로 그려졌다. 14세기 장례 장면에 16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엘 그레코의 선택은 톨레도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보는 재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세부) 엘 그레코,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1586, 산토 토메 교회
지금까지 살펴본 장면 외에도 그림에는 눈여겨볼 만한 재미있는 포인트들이 많이 있다. 그림의 1/2 지점에 가로선을 그어 보자. 위 그림의 세부를 보면 오르가즈 백작의 모습과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장면이 가로선 위로 펼쳐진다.
비교적 질서정연한 아래 공간과는 다르게 위쪽 공간은 다양한 인물들이 혼재되어 있다. 아래 공간이 현실 세계를 표현했다면, 화가는 가로선 위를 천상 세계로 표현했다. 천상의 공간 중앙에는 붉은 옷을 입고 푸른 망토를 두른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으며, 그 오른쪽엔 성 요한이 있다. 그리고 이들 위에는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팔을 벌린 채 그려져 있다. 두 성인이 매장한 오르가즈 백작의 영혼이 천사의 손길에 이끌려 심판을 받으러 올라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톨레도 시민의 자부심을 그림에 담아낸 엘 그레코
속세의 공간과 천상 공간을 동시에 배치한 구성은 이 작품의 독특한 특징이다. 화가가 어떻게 두 세계를 다른 분위기로 그려냈는지 찬찬히 감상해 보는 것도 작품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또한 관람자에게 종교적 교훈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톨레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엘 그레코의 재치는 당시 톨레도 시민들의 자부심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지난 편에서 살펴본 <톨레도 전경과 지도 View and Plan of Toledo>(1608)에서도 우리는 톨레도 시민들이 톨레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천도한 뒤에도 톨레도는 영향력 있는 상업적, 종교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따라서 톨레도 시민들이 가진 넘치는 자긍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톨레도에는 환상적인 지형과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도시 풍경뿐 아니라, 후대에 스페인 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화가로 재평가된 화가 엘 그레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만약 스페인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수도 마드리드에서 잠시 벗어나 톨레도를 여행하며 엘 그레코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것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