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월 광주에 깊게 뿌리내린 물 - 광주 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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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오월을 보내자면, 절로 ‘아, 나 지금 광주에 있구나’ 싶은 순간들이 문득 찾아온다. 내 생활과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부터 어수선하게 분주하고 고요하게 시끄럽다. 광주 소재의 대학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마음으로 대학교 축제를 초가을로 미루고, 크고 작은 행사를 5월 전후로 넘기며 큰일 없이 흐르는 듯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큰 행사를 위하여 도시 전체가 이곳저곳에서 아주 조용하지만 바쁘게 움직인다.
책을 읽으러 나간 분위기 좋은 예쁜 카페에서는 옆자리 할머니들이 1980년대 운동권 여성으로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말하는 대화가 들려온다. 이따금 대중교통에서 그 시절에는 아무도 군인을 믿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내년 오월에 만나기를 기약하며 헤어지는 말소리를 듣는다.
5·18을 다루는 다큐에 매일 보는 동네 욕쟁이 할아버지가 나와 그날의 기억을 읊는다. 귀여운 말티즈의 목줄을 쥐고 언제나 지팡이를 하늘로 쳐들고 누군가에게 향하는지 모를 욕설을 내뱉던 할아버지의 안위가 궁금해지는 달이 돌아왔다. 당시 전남일보에서 근무했다던 중년 남자 강사는 스무 살 학생들 앞에서 그날의 기사를 실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갑작스레 울고, 영어 학원 앞의 작은 공원에는 당시 시민들이 시민군에게 나누어주었다던 맨 주먹밥을 학원가는 내 손에 들려준다. 그럴 때는 나는 ‘오월이구나, 나 지금 광주에 있구나.’ 생각한다.
과거의 자취는 518번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나의 삶 속에서, 버스의 하차 문에 적힌 버스가 충장로로 향하는 정류장을 우회한다는 안내문으로, 시청 앞에 걸린 현수막들로, 지나가는 전일빌딩 앞 광장의 설치물로 체감된다.
새하얀 페인트로 새로 칠해진 전일빌딩 외관에는 당시 헬기의 총격이 있었다는 총흔이 남아있고, 그 옆 새로 중축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5·18을 기리는 마음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최후 항쟁지인 구도청의 4층을 넘어서지 않도록 지하로 층을 내려지었다. 그러니 광주라는 도시에 여전히 헬기 사격을 인정하지 않아 차마 덮을 수 없었던 총흔을 남겨두듯, 1980년의 거대한 상흔의 국지적 시대정신이 남아 있다.
4월 7일에 개막한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광주라는 지역의 특색을 살려 ‘물’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저항, 공존, 연대, 돌봄의 장소를 동시대에 소환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인생은 체계적으로 나란히 놓인 주마등 같은 것이 아니라 은은한 광륜처럼 첫 각성의 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감싸주는 반투명의 봉투 같은 것”이라는 문장에서 인용하여 ‘은은한 광륜’의 일상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광주 정신’을 시공간을 넘어선 세계 각지에서 찾아 조명하고, 예향의 도시라는 광주의 슬로건에서 과거부터 이어졌으나 식민주의 시대의 폭력에 맥이 끊긴 채 사라진 ‘조상의 목소리’를 되살린다. 우리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서구의 근대식민주의의 기존 가치관에 질문을 던지며 ‘전통, 토속’의 의미 속 포함된 경시를 되짚는다.
이어 ‘일시적 주권’으로 식민주의와 관련한 작품에서 디아스포라, 이주민, 계층 차별을 주제로 하는 현시대 이슈를 함께 지적하며, 현대 인류가 동시에 마주한 기후 위기 인류세 가치관을 사용하여 행위에 대한 관점을 행성 단위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행성의 시간들’로 마무리한다.
지난 2022년 부산 비엔날레가 항구 도시라는 부산의 특색을 크게 살리지 않아 아쉬웠던 것에 비하면 이번 광주 비엔날레는 광주의 지역색을 크게 살리며 근현대 한국과 광주의 특수성 속에서 보편성을 찾는다. 그 보편성에서 기인한 전 지구적 관점의 저항과 연대, 해방은 과거사 속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여전히 듣는 2023년의 도시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팡록 술라브, 광주 꽃 피우다, 2023, 광주 비엔날레
2관 ‘은은한 광륜’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작품은 커다란 천에 찍힌 목판화이다. 팡록 술랍의 〈광주 꽃 피우다〉(2023)는 말레이시아 예술가 집단 팡록 술랍이 광주 답사 시 접한 5·18광주민주화운동 아카이빙 자료를 보고 만든 판화 작품이다.
당시 광주의 예술가들은 5·18을 목판화 형태로 기록하였으며, 팡록 술랍은 광주 출신의 목판화 작가들과 민주주의와의 연관성을 탐구하여 과거의 고정된 사건을 동시대 타국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였다.
이 작업은 민주화운동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광주, 한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며, 집단적 저항과 연대, 애도의 과정을 전 인류의 가치로 확장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항상 접하던 한국적인 목판화가 아닌 새로운 화풍으로 마주한 5·18의 기록은 관람자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며 2023년의 관람객에서 새로운 답변과 감상을 요구한다.
알리자 니센바움, 신명, '어느 봄날', 드레스 리허설, 2022, 광주 비엔날레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알리자 니센바움의 〈신명, ‘어느 봄날’, 드레스 리허설〉(2022)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마당극을 공연한 놀이패 신명과 협업하여 작업한 회화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복과 옛날 교복과 하회탈, 그리고 니센바움의 강렬한 색채가 만나며 “삶과 예술이 서로 겹”치고 “이 겹침”에서 니센바움의 작업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타스나이 세타세리, 거품탑, 2022, 광주 비엔날레
2관 ‘은은한 광륜’에서는 직접 광주에 방문하여 광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 아카이브를 관찰하여 협업한 작품뿐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희생되는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타스나이 세타세리의 <거품탑>(2022)은 콜라주와 오일파스텔을 이용하여 태국의 권력과 부패, 그리고 관광도시로 유명한 상업적인 부분을 동시에 조명하며 미사일, 파편화된 신체, 정치적 희생 등을 표현한다.
타이키 삭피싯의 영상작품 <스피릿 레벨>(2023) 또한 반정부 운동으로 추방되어 망명하던 세 명의 운동가 중 두 명의 시체가 태국 메콩강에서 발견된 사건을 배경으로, 이 영을 추모하기 위한 영매의 모습을 담았다. 잘게 잘린 프레임은 연속되지 않고 단절된 채 두 시간선으로 끊기고, 기도하는 영매의 모습과 얼굴을 부여잡는 영매의 모습을 동시에 스크린에 투영하여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때 영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반쪽짜리 아우성에서 국가에 의하여 희생되어 사라진 존재와 그럼에도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 탈국가적 ‘광주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장지아,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 2014, 광주 비엔날레
4관 ‘일시적 주권’에 들어서면 흰 천으로 동그랗게 가려진 공간이 보인다. 그 천을 들치고 들어가면 그곳엔 깃털, 꽃 등으로 장식된 바퀴가 있다. 장지아의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이다. 작가는 바퀴가 지닌 산업 시대의 효율성과 중세 시대의 고문 도구로서 고통이라는 이중적 의미에 집중한다. 여성의 몸에 고통과 노동은 허락되는 반면 쾌락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지점을 바퀴와 연관시킨 작품은 실제 여성 퍼포머들이 바퀴 위에서 페달을 밟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안장에 찍힌 여성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퍼포머의 신체에 붉게 자국을 남기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주도권을 여성에게 되돌린다.
앨버타 휘틀, 분비 신화를 위한 행렬(옥색), 2019, 광주 비엔날레
앨버타 휘틀은 바다에서 목재를 먹어 치우는 좀조개를 “확장하는 유럽 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저항한 협업자이자 비식민주의 행위주체”라고 묘사하며, 영상작품 〈검은 발자국은 아름다운 것이다〉를 설치하였다. 좀조개가 강압적인 무력으로 나라를 침탈하는 서구 열강의 배를 먹어 치웠다면, 〈분비 신화〉 연작에서 민달팽이는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의 모습을 그린 판화에 자신의 분비물을 뿌린다. 의도성이 부재한 채 움직이는 유기체를 통해 반식민주의 작품을 표현하며, 서구 정복 신화가 왜곡하는 현실을 떠오르게 만든다.
에밀리아 스카눌리터, 아이쿠알리아, 2023, 광주 비엔날레
5관 ‘행성의 시간들’에 전시된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영상 결합 설치 작품 〈아이쿠알리아〉(2023)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의 인어나 괴물, 키메라 같은 인물이 솔리몽에스강의 하얀 물과 네그로강의 검은 물의 합류는 경계를 헤엄치는 존재를 보여준다. 무엇 하나 실제 지구의 지형, 실제 인간의 모습이 아닌 듯한 기묘한 이 영상에서 존재는 아마존의 분홍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인간은 다른 종과 ‘특별히 구분되는’ 무엇도 아닌 하나의 생물종으로 존재한 채 다른 생물종과 조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 속 경외감과 그 안 자그마한 존재의 생명력은 9분의 영상을 보는 동안 관객에게 압도감을 선사하고, 천장에 반사되어 투영되는 영상 속 배경으로 우리가 있는 현실과 보고 있는 영상의 경계를 지운다.
물은 어느 곳에나 스며든다.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물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저항정신을 타고서 식민제국주의가 흐트러트리고 이성 중심주의가 폄하하고 반복하여 타자화된 아시아의 전통적이고 토착적 지식과 문화를 꿰뚫고 상실한 주권에서 잊히고 잃어버린 존재들을 표면으로 들어 올리고, 인간의 행성으로 읽히는 지구를 뒤덮는다. 아주 부드럽고 여리게 스미고 흐르면서 네 가지의 주제가 구성하는 마디는 서로 땋아 만든 매듭처럼 엉킨다. 지독한 현실임에도 과거의 부산물이고, 이미 지나가 맺어진 일임에도 앞에 있다. 물은 이러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특성을 끌어안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당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반추할 시간이 돌아왔다고.
[양자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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