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는 아주 작은 나비 - 연극 '몬순' [공연]

글 입력 2023.04.2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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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몬순>은 국립극단의 [창작공감: 작가] 사업의 2022년도 공모를 통해 선발된 이소연 작가와 진해정 연출이 만나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엮인 가상의 세 국가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인물들이 각자의 삶에서 맞닥뜨린 전쟁의 파편과 어떻게 관계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바람과 소음, 폭풍과 폭우를 동반하며 대자연의 저력을 과시하는 ‘몬순’처럼, 개인의 힘으로 막을 방법 따위는 없는 무자비한 사건이 덮쳐왔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이처럼 거대한 파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몬순 포스터.jpg

 

 

인류는 전쟁을 거쳐오면서 일종의 고통스러운 진보를 반복하며 성장해왔다. 늘 그래왔듯이, 전후(戰後)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기에 <몬순>의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역할을 자문하며 ‘전쟁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동시에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혼돈으로부터 고통받는 약자를 구원할 수단이 과연 존재하는지 토론하며 답이 없는 고민을 거듭한다.

   

 

몬순 인물관계도.jpg

국립극단 <몬순> 프로그램북 발췌

 

 

상술했듯 몬순의 무대에서는 하나의 세트를 활용하여 세 국가의 상황을 동시다발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공간에서 현재 전쟁과 전투가 빗발치고 있는 곳은 ‘타트’라는 국가다. ‘네이지’, ‘코우쉬코지’, ‘문’은 타트 국가 출생으로서 각각 A, B, C 국가에서 거주하고 있다.

 

A 국가의 ‘차미’는 전쟁물자를 포함한 여러 상품을 폭넓게 개발하는 다국적 기업 ‘몬순’의 연구원이다. 네이지는 차미의 집에서 홈스테이하며 차미의 아들 ‘굴’을 돌본다. 코우쉬코지는 B 국가의 모 대학원에서 수업을 몰래 듣고 있으며, 전쟁을 주제로 작품을 만드는 ‘새벽’을 마주친다. 문은 C 국가에서 거주하면서 ‘리오’와 연애를 하고, ‘홀키’와 친목을 다진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인물 간의 관계는 전쟁과 같은 범국가적 악행이 단순히 거시적인 선악 구도로 나누어 대립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상징한다. 극 중에서 전쟁 중인 타트에 남아있는 네이지의 가족은 ‘몬순’ 회사에 소속된 이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다. 이 사실을 통화로 전해들은 네이지는 자신이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인 차미가 몬순 사의 소속이라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과 절망을 느낀다. 차미는 자신의 업이 전쟁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항변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전쟁범죄에 조금이라도 일조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함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공공연히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참한 살육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우리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문제없이 살아감에 안도한다. 오늘 먹고 내일 입을 것을 걱정하며, 가끔 유튜브에서 지구촌 이웃이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의 피해로 전 국민이 울부짖었음에도, 이제는 극복했고 어차피 개인으로서 타국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면, 우리 세대의 도덕적 책무는 소멸한다.

 

 

몬순1.jpg

 

 

<몬순>에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도덕적 책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쟁 국가에서 떠나온 사람이 나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가족으로서 내 옆에 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들 서로 간의 세부적인 차이(정치, 경제, 종교, 인종, 젠더, 성적 지향)로부터 파생된 갈등은 각 국가 안에서의 ‘작은 전쟁’을 초래하기도 한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회 안에서도 얽히고설킨 지배구조와 폭력이 약자를 억압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무대에서는 조명과 사운드의 구별을 두어 등장인물이 존재하는 공간을 나누어 보여주기는 했으나, 각 국가의 경계를 엄밀히 나누려 하지 않고 때에 따라 혼합하여 보여주는 등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설계한 공간 연출이 돋보였다. 극본 또한, 애초부터 고전 연극의 작법에서 벗어나서 쓰였는데, 사건의 인과관계를 나열하기보다는 시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여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었다. 관객으로서 처음에는 가상의 국가가 여러 개나 등장하는 판타지에 빠져들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각 인물이 가진 서사와 특징이 명확해 생각보다 쉽게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었다.

 

 

몬순 무대2.jpg

 

 

<몬순>에서는 LED 영상을 이용해 흩날리는 바람과 비 내리는 야외를 표현한다. 생각해보면 바람과 비는 참 별거 없는 자연 현상이다. 바람은 그저 기압 차에 따라서 발생하는 공기의 움직임이고, 비는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수분 덩어리일 뿐이다.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솔솔 와도, 우산을 치켜들고 몸을 피해서 집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몬순, 휘몰아치는 계절풍 기후를 만나면 이것들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 된다.

 

극 중에서 굴은 유리 조각을 흩뿌리는 거대한 유리 괴물이 나오는 동화를 이야기한다. 유리 괴물은 인간을 죽이고 파괴한다. 이는 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괴물일까? 내 안의 유리 괴물, 혹은 우리 집단이 만들어낸 유리 괴물이 또 다른 인간을 죽이고 있지는 않을까?

 

수년 전 미국 서부를 화마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원인이 한반도의 태풍이라는 연구 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큰 변화를 촉발한다는 뜻의 나비 효과라 부른다. 언뜻 보면 너무나도 작아 보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무엇도 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한없이 부끄럽다. 내가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기력하여 놓아버린 것을 되돌아보려 한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내려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것의 일부라는 것을 직시해야겠다. 적어도, <몬순>이 관객에게 던진 몫은 주어진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살아가라는 확언일 테다. 네이지가 차미에게 건넨 말처럼.

 

“차미가 서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곳은 서로 너무 멀지만, 다르지 않아”

 

 

[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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