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의 신비로운 치유능력에 대하여 -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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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다'.
고요한 그림이 내게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요함을 거스르면서까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 나에게 꼭 도달해야하는 메세지가 있다는 건 어쩌면 내가 그림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무의식속에서 깨어난 위대한 창조일지도 모른다.
<도서>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다는 55가지의 그림으로 우리의 마음에 살며시 노크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현재의 마음에 대한 진단과 성찰, 치유로 이어지도록 이끌어준다.
처음 샤갈의 그림을 봤을때 그림에서 따뜻한 에너지보다는 거리감을 먼저 느꼈는데, 그 근원은 구도상의 불안정감과 현실적이지 않은 인물들의 묘사에서 왔을 것이다.
왜 여성은 45도 각도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위태로운 자세로 서있으며, 남자는 목이 꺽인채로 공중부양 중일까. 하지만 이 그림은 샤갈이 첫눈에 반했던 벨라와의 결혼을 몇주 앞뒀을때, 자신의 생일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마르크 샤갈, <생일 Birthday>, 1915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기위해 찾아와 소중한 날을 함께 보내는 것은 정말 특별하고 감동적인 일이다.
샤갈의 키스는 그 당시 그가 느꼈던 설렘과 기쁨을 초현실적인 구도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제서야 그림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벨라와 샤갈은 이 작품을 그린 후로도 변함없는 사랑을 하며 30년이라는 세월동안 서로에게 소울메이트가 되어주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샤갈 부부를 통해 이상적인 사랑을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끌어 가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사랑은 이상적, 일상은 현실적이다. 연인과 부부들이 일상 속에서 사랑의 가치를 온전히 보전하려면 일상과 이상의 대립에서 오는 괴리와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이상적인 사랑이라도 일상 속에 서서히 스며들다 보면 그 이상이 익숙함 속에서 힘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한다.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있는가? 지친 일상이 버거워 잠시 사랑의 가치를 홀대했던 것은 아닌가?
로렌스 알마 타데마, <부끄러움 Shy>, 1883
이 그림은 주기만 하는 사랑에 지친 사람의 마음과 사랑에 있어서의 공평성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그림이었다.
그림에서 남자는 진지한 태도로 여성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있는 한편 여자는 선물에 기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내색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여성이 수줍어서 표현에 인색한 걸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남자의 마음이 여자의 마음보단 훨신 큰 것으로 보이긴 했다.
사랑을 주고 받는것에 대해 마음의 크기를 재고 공평성을 따지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행위인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건넸던 마음이 돌아오지 않거나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때 외로움과 공허함, 실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랑 앞에 주눅들지 않으려면 사랑할 때 느끼는 설렘을 더욱더 귀중히 여겨야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사랑을 받을때보다 사랑을 나눠줄 때가 더 행복하기 때문에 주는 사랑에 실망하지 않으려면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헨리 시돈스 모브레이, <스튜디오에서의 점심식사>, 1880~1883
이 그림에서 작가는 '케렌시아(Querencia)'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타인과 관계를 나누다 보면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반드시 오는데, 모든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싶을 때 필요한 단어. 케렌시아는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을 의미하는 스페인어로 소가 투우사와의 싸움에서 지치거나 죽음을 예감할 때 자신만의 케렌시아로 이동해 숨을 고르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모두와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지친 일상의 반복과 끊임없는 도돌이표 같은 업무의 연속. 그 속에서 나의 성장과 목표, 추진력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 특히 나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실감한다.
가끔은 내 부족한 역량에 대한 실망감과 자책 때문에 이러한 고민들로부터 모두 해방된 새로운 곳으로의 회피를 상상해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내가 케렌시아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할 때임을 증명한다.
삶의 쉼표가 절실한 순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반드시 필수적이면서도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의지의 대상이 사람일 수도, 편안한 장소일 수도,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는 취미일 수도 있겠지만.
조지아 오키프, <음악-분홍과 파랑 No.2>, 1918
이 작품을 그린 화가 오키프는 커다랗게 확대한 꽃을 몽환적으로 표현해 '꽃의 화가'라고 불리는데, 그녀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는 존재를 색과 형태로 표현했다.
나에게 색과 형태는 말보다 훨씬 더 확실한 진술이다.
- 조지아 오키프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말이라는 도구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때 음악가는 음악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마음의 말을 대변하는데 이 작품은 내게 궁금증을 자아내게끔 만들었다.
파랑과 분홍의 선명한 대비가 두드러지면서도 부드러운 조화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 표면적으로만 보면 말보다 더 모호한 그림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세밀하게 관찰해보고 싶기도 했다.
제목의 의미 그대로 음악의 의미를 노래한 그림인지 사랑에 대한 색채를 말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또다른 숨은 의미가 있는지는 계속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랑을 이 세상에 없던 것처럼 마음에서 비우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유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죠.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담아 두고 추억하는 건 내 마음이 아닌 예술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 262p
사랑의 온기가 따뜻한 햇살처럼 느껴지는 작품, 키스. 작가의 말처럼 진심을 바쳤던 사랑을 마음에서 지우는건 불가능하다. 비울 수도 없거니와 비우려하면 할 수록 내 마음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 때문에 나를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 위대한게 아닐까.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 않던 마음의 공허함과 상처도 예술의 신비로운 치유 능력 덕분에 아문후, 새 살이 돋을 수 있는것처럼.
[이소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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