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감히 구원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 밀양 [영화]

실낱같은 삶의 가능성, <밀양(2007)>
글 입력 2024.05.0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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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인지 모를 먼 곳에서부터 출발한 한 여인이 텅 빈 도로에서 길을 잃는다.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걸며 이곳이 어딘지, 심지어는 본인이 어디서부터 왔는지조차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이라는 소박하게 다정한 이름을 가진 땅에 들어서며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던 그녀는 이전 삶에서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잔인한 생의 모습을 다시 한번 직면하게 된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종교, 유괴, 구원, 용서와 같이 많은 키워드를 제시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섣불리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가 진정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강렬한 사건들이 삶을 휩쓸듯 지나간 후 홀로 남겨진 한 인간의 남루한 뒷모습이다. 영화는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된 개인이 궁지에 몰린 그 순간, 그때만이 진정으로 내가 나로서 혼자 설 수 있다는 그 비밀스럽고 미약한 가능성에 시선을 맞추며 끝이 난다.


그러니까, <밀양>은 잔인한 영화다. 그 실낱같은 미약한 가능성을 만나기 위해 지독한 괴로움을 오래 겪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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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청준 작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두 이야기는 모두 한 여인이 유괴 사건으로 아들을 잃고 신의 구원과 인간의 용서 사이에서 혼란해 하는 서사의 큰 맥락을 공유하지만, 그 ‘길 잃음’에서 인물이 선택하는 각기 다른 과정과 결말에 주목한다.


소설과 영화는 큰 맥락을 공유하며 공통된 주제 의식을 전한다. 바로 타인의 고통은 절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소설은 아들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을 통해 서사를 전달한다. 남편은 아내의 혼란을 광기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기보단 관찰하고, 공감하기보단 우려한다. 오직 남편의 목소리로만 아내의 좌절은 전해지고, 아내의 고통은 남편이라는 타자에 의해 해석되어 그의 편견이 담긴 언어의 몸으로 독자에게 읽혀진다.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스토리텔링이다. 타자화된 고통의 재현, 소설이 의도한 그 폭력은 서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공고히 한다.


반면 영화는 소설이 택했던 서사의 권위자(남편)를 애초에 부재 상태로 둔 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히 영화는 그녀가 혼자된 상태에서 기대고자 하는 여러 것들을 서서히 무력화시켜, 그녀가 이야기 밑으로 홀로 가라앉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 삶의 지지대는 아들이었다가, 재화였다가, 종교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지지대가 힘없이 부서진 뒤 남은 것은 인간의  약한 두 다리뿐이라는 것을 시리도록 체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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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들어선 그 공간에서 또다시 아들을 잃는다. 영화가 의도한 상실의 반복은 신애를 벼랑 끝에 세워두면서도, 결코 그의 삶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동력으로도 작용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는 그 거대한 먹먹함 앞에서 그저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유괴 사건이라는 소재가 영화의 스포일러가 아닌 이유는, 그 강렬한 사건 하나가 불러오는 삶의 시작점에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신애가 그토록 포효하면서도 소실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삶에서 반복된 상실들이 그녀에겐 삶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밀양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위안받기 위해 선택했던 첫 번째 지지대(재화)는 그녀의 아들 준이 유괴당하는 핵심적인 이유로 변모했다. 그 지지대는 아들 준을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신애 자신의 위태로움을 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신애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애는 여러 번의 상실 끝에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보이는 것조차 믿을 수 없다던 영화 초반의 신애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는 결국 보이지 않는 존재(신)를 믿게 된다. 그것을 맹신하는 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녀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삶의 지지대 삼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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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서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삶의 벼랑 끝에서 마주한 신은 결국 그녀를 절벽 아래로 떠민다. 종교적 삶을 살며 신의 뜻을 이행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살던 신애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유괴 사건의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한다. 신애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러 교도소로 향했지만, 가해자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도 종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며, 심지어 그녀와 준에게 지은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신애는 혼란스러워진다. 구원이 신의 권리라면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 즉 신애의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던 신애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분노하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권리마저 신에게 뺏겨 버린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외친다. 나 너한테 절대 안 져. 감히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인간의 나약한 자리를 손으로 짚어주는 매정한 신마저 그녀의 지지대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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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벼랑의 끝의 끝으로 몰리던 신애는 결국 그 밑으로 추락한다. 떼어내고자 했던 이전의 나와, 나의 나약함이 초래한 삶의 사건들, 그로 잃었던 수많은 소중한 것들이 혼란하게 그녀를 뒤덮는다. 결국 그녀는 직접 그 남루한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지대 없이 그 모든 것을 버티던 신애는 마지막 순간, 지나가는 이름 모를 아무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다시 삶은 이어진다.


<밀양>은 모든 것이 끝난 것만 같은, 더 이상 논의할 수 없을 만큼 낮아진 그 자리에서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껏 낮아진 그 땅바닥에 떨어진 인간을 결국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혼자 서게 된 그 두 발을 보게 한다. 영화는 밀양의 아주 볼품없는 그 땅바닥에 비친 ‘비밀의 햇볕’을 비추며 끝이 난다. 물론 그곳에 존재하는 아주 미약한 삶의 가능성도 함께.

 

 

[차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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