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소한 것들이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글 입력 2024.02.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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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어쩌면 회전문과 같을지도 모른다. 12월 중 가장 기대되는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날은 화려한 트리와 선물로 이루어진 설레는 순간들도 있지만, 문을 밀고 나간 밖의 세상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그동안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즐기는 것과 동시에 그 문밖에서 사는 이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116쪽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내용이 담고 있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아 역설적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며 크리스마스의 양면성을 전부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의 외면으로 추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누군가의 관심으로 그곳을 벗어나는 이들 역시 존재할 수 있기에.

 

 


크리스마스 1 - 가정


 

이 책의 덧붙이는 말에는 소설이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임을 밝힌다. 그러나 책 앞장에는 이 작품을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바치는 것임을 명시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단순한 고발이나 정보전달만이 목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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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주인공 ‘펄롱’의 내적 심리와 생각을 바탕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아내와 다섯 딸을 둔 펄롱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한부모 가정이었던 그는 가정부인 엄마를 두었지만, 집주인과 농장 일꾼 ‘네드’의 친절과 호의를 받으며 자란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의 반복적인 일상이 힘든 세상 속에서의 특권이자 안온함의 증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이러한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일 수 있음을 민감하게 지각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케이크를 만드는 아내, 받고 싶은 선물을 쓰는 아이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더없이 설레고 평온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던 펄롱은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나갔다가 창고에 갇힌 어린 여자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크리스마스 2 - 수녀원


 

평판이 좋기로 유명한 수녀원의 모습과는 반대로 그곳에서 발견한 어린 소녀는 남루한 옷차림과 보호받지 못한 외양을 띠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아이의 말을 뒤로하고 온 펄롱은 이내 수녀원의 불법적인 정황을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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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소재로 다뤄지는 수녀원은 실제 아일랜드 막달레나 세탁소를 기반으로 한다. 1922년부터 시작되어 1966년이 되어서야 문을 닫은 이 세탁소는 매춘부와 미혼모, 고아 소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생겨난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은폐되고 강제 노역을 당하며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조차 받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한 채 착취당한 이들은 성폭행과 심한 매질을 당하기까지 한다. 


더욱 충격적인 건 이 시설이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수백 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사망했다. 실상이 밝혀진 뒤로도 정부는 아무런 사과의 뜻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이 시설을 폐쇄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여성과 아이를 착취한 사실이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건 주변의 암묵적인 시선도 한몫한다. 펄롱은 세탁소의 실체를 아내에게 말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와 상관없다는 말일 뿐이다. 세탁소의 실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함구하는 어른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과 핑계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크리스마스 3 - 사소한 것들


 

하지만 주변의 만류와 시선에도 펄롱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사소하지만 따뜻한 정성과 안온한 일상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양심의 소리였다.


책의 제목과도 연결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어린 시절 펄롱이 받았던 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집주인과 네드로부터 낡은 어휘사전과 보온 물주머니를 받은 펄롱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숨죽여 운다. 하지만 그는 집주인이 준 어휘사전 덕분에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할 수 있었고 네드의 보온 물주머니로 인해 밤마다 따스함을 느꼈다. 


그중 네드가 펄롱에게 보여준 정성은 작고 소박하지만 좀 더 특별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네드를 방문한 펄롱은 그가 병이 악화되어 요양원에 갔다는 소식과 동시에 그와 참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후 상기시키는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 자신의 구두를 닦아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며 면도법을 알려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꽤 자주 아버지의 존재를 네드에게 물어봤으나 대답해주지 않고 펄롱 곁에서 묵묵히 보여준 친절은, 어쩌면 소박하고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힘이 되어 거대함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보여주며 마음 한편을 뭉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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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펄롱 역시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 거대하게 나타날 수 있는 관심을 보이기로 결심한다. 그는 수녀원에 있는 아이의 상태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고 미사를 보러 간 사실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어른이었으며, 안온하고도 반복되는 일상이 몰락으로 바뀌는 두려움보다 누군가를 돕는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수녀원에 가서 소녀의 이름을 묻고 자신의 집에 함께 갈 것을 요구한다. 그가 소녀와 함께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결심을 굽히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4 - 원하는 길


 

수녀원에서 소녀를 처음 본 날 펄롱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 탓에 길을 잘못 든다. 안개가 내려앉고 점차 좁아진 샛길로 들어선 그는 한 노인에게 길을 묻는다. 그러자 그 노인은 길과는 상관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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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엉뚱한 대답처럼 여겨졌지만, 소녀에게 가는 길에서 그는 노인의 말을 떠올린다.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고 걸어가는 그 길은 한 개인을 넘어서 인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 된다. 그가 소녀에게 가기까지 그리고 그 소녀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걸어오기까지의 걸음은 어린 시절 펄롱이 주변 어른에게 받았던 친절과 연결된다. 그 친절이 거창한 무언가는 아니었지만 하나씩 쌓여 펄롱의 삶이 되었고 그 삶은 또 다른 누군가의 길을 터주는 방향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펄롱은 두려움이 압도하는 감정에도 소녀와 함께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결심한 이상 그 길은 본인이 원하는 데로 갈 수 있음을 알기에.

 

대다수가 즐거워하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즐기는데 몰두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준 그를 통해 우리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뻗어 나갈 새로운 길의 가능성을 넓히게 된다. 그리고 그 길에 들어설 사람들에게 관심을 확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와 새롭게 시작될 길에 대한 환영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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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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