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의미한다. 나는 새해가 밝으면 일기장 맨 앞에 버킷 리스트를 적는 습관이 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이루고 싶은 걸 정리하고, '버킷 리스트'라는 이름을 붙인다. 눈 깜짝할 새에 스물넷이 되었고, 해가 지날수록 성숙해지는 몸과 마음을 마주한다. 어쩐지 1월 1일이 되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일상을 보내면서도, 한 번 죽었다 깨어난 듯한 모순을 떠안는다. 그래서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에는 늘 죽음이 따라붙는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라는 마음으로.
스무 살이 되고서부터 버킷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세웠다.
<2025년 버킷리스트>
8~10가지가 되는 항목을 쭉 늘어놓으면, 게 중 몇 개는 1년이 다 지나기 전에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바라는 것이 있는 삶'을 가지기까지 꽤 헤맸던 것 같다. 나는 종종 과거에 쓴 일기를 다시 읽으며,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내가 이런 문장을 썼었구나, 이땐 이러한 마음이었구나. 지금이랑 꽤 달랐네? 아, 지금이랑 별다를 게 없네. 전혀 다른 시간 선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은 죽고 없을 세포들이 남긴 흔적을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한다.
'엄마는 우울할 때 로또를 산다. 이 정도의 행운이 내게도 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 그 마음이 부러운 거 같다, 나는.'
얼마 전에 21살 때 쓴 일기를 다시 읽었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이상하게 20살, 22살, 23살의 기억은 꽤 선명한데 21살만 없었던 해인 것처럼 삭제가 되어있다. 그래서 그 시기의 일기를 읽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누군가 갈기갈기 찢어둔 천 쪼가리를 봉합해 조각보를 만든 것 같달까.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지울 수 없는 기억은 시간에 덫을 쳤고, 나는 덫에 걸려 꼼짝없이 굶주렸다. 눈을 뜨면 과거의 고통과 불안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고,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그때 위안이 되어줬던 건, 우주 영상이었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지구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에 마음이 편했다. 내가 삭제된다는 게, 없었던 일이 된다는 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깨어나기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 진한 다정함과 사랑을 안겨준 이들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점점 이루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런데 요새 나는 또다시 무기력의 길을 걷고 있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기분이다. 자도 자도 피곤하고 식욕도 없지만 일을 하고, 청소하고 바깥 공기를 맡으려고 창문을 연다. 그렇게 일상의 루틴을 지키면서도 거의 매일 꼬박꼬박 울었다. 어쩐지 슬픔이 하나의 장기가 되어 심장 옆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바로 어제, 애인한테 이런 내 근황을 털어놓았다. 그의 답을 듣자, 마음이 드림캐처의 깃털만큼 가벼워졌다.
"나는 결국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운 건, 자신이 동물이라는 걸 망각하기 때문이라 생각해. 스스로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간절해져야 한다, 이루고 싶은 게 있어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오히려 나를 더욱더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뚜렷한 목적이 이끄는 삶도 좋지만, 때론 어떤 도착점을 정해두지 않고 방랑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 무언가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 없이도 지금 당장 느끼는 것에 집중하는 거다. 그가 말한 '인간도 동물'이라는 이야기는 마치 내가 스물한 살 때 즐겨보던 우주 영상처럼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굳이 무언가를 해내거나 증명해 내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죽기 전까지 주어진 하루하루 감각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건조기에서 막 꺼낸 이불의 따스함. 머리를 막 감고 말렸을 때의 개운함. 애인이 갑자기 안겨다 준 꽃다발의 향기. 누군가를 안았을 때 들을 수 있는 심장 박동 같은 것들. 남들이 얘기하는 특별한 삶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무기력에 잠긴 지금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감각에 집중하고 싶다. 무기력한 나를 죄악시 하지 않기. 무기력을 꼭 이른 시일 내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기. 하고 싶은 게 구체적으로 생길 때까지 방황이 아닌 방랑을 하기. 그것이 내 생명의 현상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죽기 전까지 그저 살고자 한다.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
나는 삶을 이루고 싶다.
** 가능성과 가능성 **
얼마 전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민들레. 오른쪽은 활짝 핀 노란 민들레, 왼쪽은 꽃이 지고 나서 홀씨가 된 민들레이다. 둘 다 민들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나 다른데. 꽃을 보자마자 떠오른 단어는 '가능성과 가능성'이었다. 노란색 민들레가 다 지고 나면 수십 개의 꽃이 필 다음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홀씨가 바람에 흩날려 어딘가로 날아가고, 땅에 묻히면 노란 민들레가 다시금 피어날 것이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민들레처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꽃이 다 졌다고 슬퍼하지 말고, 바람에 날아가는 지금 이 가벼움을 즐기고 싶다. 결실을 보아 눈부시게 노란 나도, 그저 바람에 날아가길 기다리는 홀씨인 나도 결국 똑같이 살아있는 '가능성과 가능성'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