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구적인 우주 이야기 - 청혼 [도서]

배명훈, 『청혼』(북하우스, 2024)
글 입력 2024.05.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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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대한 우주를 상상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즐거워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실제 우주의 형상을 어느 때나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런 우주를 그려내는 대중매체들의 표현 기술마저 나날이 발전하기 때문일 테다. 우주를 향한 우리의 막연했던 상상은 기술의 힘으로 생동감을 입는다. 이제 우리는 우주를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를 본다.


각종 기술을 이용해 스크린에 정확히 구현된 우주를 목격하는 일은 (소비의 관점에서) 적은 수고를 들여 얻을 수 있는 대단한 경험이다. 다만 우주가 눈앞에 가까워지면서 제한되어버린  상상이 아쉬운 순간이 있다. 중력이 없는 텅 빈 우주를 맘껏 부유하는 꿈, 우주의 생명체를 조우하는 감격, 우주적 거리를 뛰어넘는 사랑 따위를 오직 머릿속에서 마음껏 상상해볼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보이는 우주 너머, 더 넓은 우주의 서사를 풍부하게 상상하고 싶을 때 우리는 다만 소설책 한 권을 펼쳐볼 수 있을 테다.


배명훈의 소설 『청혼』(북하우스, 2024)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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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이 ‘청혼’이다. 지극히 지구적인 사건의 제목을 가진 소설인데, 중심 배경은 철저히 지구의 바깥이다. 아마도 먼 미래, 우주 진출에 성공한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지구에서 태어나 여전히 지구에서 살아가는 지구인과 우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활하는 우주인이다. 우주인은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살아가기에 골밀도나 근력을 비롯한 신체의 발달이 다를 뿐더러, “중력이 몸을 끌어당기는 소리”(13쪽)에 열광하는 지구인과는 다르게 위와 아래를 구별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다만 두 집단은 안보를 중심으로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요컨대 지구인과 우주인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동일한 우주 내 존재로 공존해야 하는 것.


궤도연합군의 우주 함대가 “악마 루시퍼의 이름을 딴 빛의 입자를 빛의 속도로 날려 보내는 무기”(32쪽)를 사용해 정체불명의 외계 함대에 맞서는 거대한 전쟁을 읽는 내내 우리는 오직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그럴듯한 우주 환경과 기술 묘사가 힘을 더하므로 상상은 지루하지 않게 유지된다. 안정된 설정 위에서 ‘지표면연합’과 같은 정치 집단의 존재, 성장한 무력 집단의 반란에 대한 불안, 내부와 외부의 적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며 발생하는 갈등이 소설 전체를 “버글러의 모순”(31쪽)처럼 흥미롭게 흔든다. 이처럼 우주 공간에 지구적 사건들을 섞은 전개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소설이건만, 『청혼』은 거대하게 벌여놓은 이야기를 차분히 다지는 일까지 성공한다.


SF장르가 흔히 다루는 압도적 규모의 우주 전쟁의 서사에 작은 숨구멍을 내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궤도연합군 소속 장교로 외계 함대와 맞서야 하는 우주인 ‘나’와 지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지구인 ‘너’는 우주적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음을 주고받는다. “네가 느끼는 세상”(13쪽)을 함께 느끼고 싶은 ‘나’의 사랑 이야기는 이 소설을 중력처럼 지구적 관점에 붙들어 놓는다.


 

마음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어. 주정뱅이의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 거리까지 재빨리 다가가는 것.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렇게 했어. 그리고 너에게 말했지. 사랑한다고. (…) 하지만 그 거리에서라면 절대 놓칠 리가 없었어. (36-37쪽)

 


사랑이라는 소재가 이렇듯 아름다운 문장들을 통해서 우주 전쟁에 삽입된다. 흥미로운 상상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들어차는 인간적 마음이 광막한 SF소설을 문학적으로 채운다. 너를 사랑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나의 안타까움과, 그런 나를 기다리며 “때가 되면 찾아와”(110쪽) 답해주는 너의 인내가 “지구 출신과 나 같은 우주 태생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장벽”(115쪽) 너머, 아득한 거리에서 “너의 별이 되어”(154쪽) 반짝인다. SF소설의 영역에 사랑이 끼어든다.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전에 쓰인 소설이 새 옷을 입었는데, 그 맵시가 여전히 촌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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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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