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처음'으로부터 성장한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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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클리셰구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진부한 장면이나 판에 박힌 대화, 상투적인 줄거리, 전형적인 수법이나 표현을 지칭하는 용어로 알려진 ‘클리셰’. 지난 10월에 공개되어 지금까지도 인기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날 영화, <20세기 소녀(2022)>를 시청하는 내내 ‘클리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솔직히 단어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영화는 꽤 재미있게 시청했다. 단지 참신하거나 독창적이지는 않았을 뿐. 사랑스러운 주인공과 풋풋한 학창시절의 추억, 아날로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는 다분히 뻔했을 지는 몰라도 아련한 첫사랑과 그리운 청춘의 감성을 잘 그려내고 있었다.
사실 <20세기 소녀>뿐만 아니라 많은 첫사랑 로맨스물들은 다소 뻔한 구석이 있다. 스토리도, 주인공도, 배경까지 각기 다른 데도 불구하고 환기되는 감정들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꾸준한 인기가 있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첫사랑 로맨스물이 담고 있는 ‘뻔함’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처음’은 언제나 특별하다. 이 세상의 첫 공기를 마신 날인 ‘생일’을 매년 축하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을 담은 경험들은 수많은 기억들이 세월이 흘러가며 스러지는 우리 삶 속에서도 오래도록 아름답게 제 자리를 지켜낸다.
하지만 그 처음들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은 결코 완성미에 가깝지는 않다. 모순적이게도 ‘처음’이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어설프고 실수 투성이지만 가장 순수하고 풋풋한 시절의 경험과 시도들은 그 이후의 것들이 제아무리 완벽하고 위대한 성장을 이룩했을지라도, 그 때묻지 않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사랑의 의미도, 해당 장르물의 인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투른 감정과 어설픈 행동, 그 사이에 놓인 순수한 사랑은 비록 그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한층 성숙해진 마음과 함께 소중한 추억이 된다. ‘성장’, 그것이야 말로 첫사랑을, 나아가 모든 처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 아닐까.
첫사랑 로맨스물의 바이블, 영화 <플립(Flipped), 2017>
‘처음’의 아름다움을 예쁘게 표현해 낸 첫사랑 로맨스물 하나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동명의 소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해 낸 영화 <플립, 2017>은 2010년 미국에서 개봉되었지만, 당시 국내 극장에서는 상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대중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플립>은 7년만인 2017년 정식 개봉의 쾌거를 이루어 냈고, 2021년 재개봉의 영광을 얻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상한 ‘꼰대’ 기질이 하나 있다. 원작을 각색한 작품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작을 미리 알아봤다는 얄팍한 우월감이 원작에 대한 비상식적인 집착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객관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서도 원작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플립>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영화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전문 지식이 거의 전무하기에 어떤 것이 보다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영화가 지닌 시각성은 주인공 줄리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너무나 예쁘게 표현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원작을 1960년대로 변경한 것 역시 ‘첫사랑’의 순수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전자기기도 소셜미디어도 발달하지 않은 시대는, 수단의 장벽으로 인해 주인공들의 마음을 말과 몸짓, 행동으로만 전달하는 배경이 되어, 사랑의 감정을 보다 순수하고 소중하게 표현해 낸다.
<플립> 역시 클리셰가 아닌가 하는 지적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흔한 첫사랑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작품의 가치가 평가절하 됐다는 찝찝함이 남는다. <플립>을 직접 시청하고 나면 ‘첫사랑 로맨스물의 바이블’이라는 수식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의 인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섦 속의 익숙함, 플립 속의 동백꽃
김유정의 <동백꽃, 1936>은 한국인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작품일 것이다. 뜬금없게도 <플립>을 보다가 <동백꽃>을 떠올렸다. 시대도 국가도 다를 뿐더러, 첫사랑의 풋풋함을 제외하고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 역시 차이가 분명한데도 줄리에서 점순이를 발견한 것이다.
<플립>의 줄리와 <동백꽃>의 점순이는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사랑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진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표현 방식은 각자 다른 면에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준다.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줄리의 행동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 거부감을 주고, 호감이 묻어 있는 점순이의 행동은 이른바 ‘츤데레’ 같아서 오해를 산다. 상대를 고려하지 못한 행동으로 선한 의도에 걸맞지 않는 결과를 얻는다는 점에서 두 주인공은 닮아 있다.
여담으로 <동백꽃>의 ‘나’와 <플립>의 브라이스는 둘 다 여주인공들의 적극성과 대비되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될 것 같다.
<플립>에서 <동백꽃>을 떠올린 결정적인 이유는 ‘닭’이었다. 두 작품에서 ‘닭’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플립>에서는 브라이스의 비겁함을, <동백꽃>에서는 ‘나’의 둔한 성정을 드러내는 소재로 닭이 등장한다. 두 작품에서 모두 닭은 극의 흐름에 반전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한다. 닭싸움을 계기로 <동백꽃>의 ‘나’는 사랑을 깨닫고, ‘달걀 사건’을 계기로 <플립>에서는 두 주인공들의 애정 전선에 변화가 생긴다.
또한 <동백꽃>의 ‘감자’는 <플립>의 ‘달걀’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상징하는 ‘감자’와 ‘달걀’은 상대의 거절을 통해 두 인물의 태도 변화를 가져온다. 호의를 거절당한 점순이는 닭싸움을 통해 삐뚤어진 애정을 표현하고, 브라이스의 비겁함을 목격한 줄리는 그에 대해 지니고 있던 기존의 환상을 깨뜨린다. 음식이라는 소재로 애정을 표현하는 순수함이 동서양의 시공간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춘기 소년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이끌었다.
<동백꽃>이 지닌 ‘해학성’은 한국 문학사에 김유정이라는 소설가가 미치는 영향력과 해당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요소이다. 1930년대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동백꽃>은 암울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 속에 드러나는 ‘신분차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동백꽃>이라는 작품이 마냥 가볍게 느껴질 수만은 없는 이유가 된다.
해학성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플립> 역시 동일한 상황에 대한 두 주인공의 상반된 인식에서 오는 웃음이 존재한다. 특히 각 주인공이 서술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극의 흐름 속에서 재치 있는 대사들은 잔잔한 웃음 포인트가 된다.
하지만 <플립> 역시 마냥 가볍지는 않다. <동백꽃>에는 시대상에서 기반한 불합리함이 반영되어 있다면, <플립>에는 ‘빈곤’, ‘단절’, ‘차별’ 등의 사회 문제가 담겨 있다. 이들이 첫사랑을 겪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성장 과정에 녹아 교훈을 준다는 점이 <플립>이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플립>과 <동백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의 작품이다. 서로를 떠올릴 만한 지점은 있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도 느껴지는 감상도 비슷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의 풋풋함과 어설픔은 동서양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적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서 감상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재미가 되리라는 점에서 함께 향유해 보는 것을 감히 추천해본다.
Flipped: 뒤집힌, 완전히 반한
작품의 제목인 ‘Flipped’은 중의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작품을 구성하는 구조가 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뒤집힌’이라는 뜻처럼 영화는 줄곧 줄리와 브라이스를 통해 동일한 사건을 두 개의 시각에서 보여준다. 다르다 못해 가끔은 상반되기도 한 두 입장을 바라보며 객관적 진실과는 별개로 결국 우리는 주관적인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독특한 화면 연출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줄리에서 브라이스로, 브라이스에서 줄리로 시선이 변화할 때마다 상하좌우로 화면이 전환되는 것 역시 뒤집힌다는 제목에 충실한 연출이었다. 뒤집히는 화면과 함께 전환되는 시각을 통해 ‘Flipped’라는 제목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줄리와 브라이스의 전세가 역전되는 것도 ‘flipped’을 잘 설명한다. 처음에는 줄리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만, ‘전체를 바라보는 눈’과 함께 한층 성숙해진 줄리는 브라이스의 비겁함에 실망하고 길었던 애정을 접는다. 반대로 동일한 시점 ‘진가를 알아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있던 브라이스는 줄리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두 주인공의 입장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서사가 전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손’이 작품 후반부에 두 사람의 애정을 상징하는 매개로 사용되는 것 역시 인상적인 연출과 서사였다.
상반된 가정환경 역시 또 다른 ‘뒤집힌’ 지점이다. 줄리네 가정은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자유로우며,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가정이다. 반대로 브라이스의 가정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가정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가족 내 소통 단절의 주범이다. <플립>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두 가정을 제시하면서 관람객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Flipped’의 또 다른 주요 뜻은 ‘반했다’이다. 브라이스의 대사 “I had flipped, completely”를 통해 이 뜻은 직접적으로 제시되는데, 줄리에 대한 사랑을 자각한 브라이스는 ‘flipped’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녀에게 완전히 반했음을 인정한다.
단순히 ‘뒤집혔다’는 의미로 인식하고 감상을 하다가 브라이스의 대사를 보고 좋은 제목의 가치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별다른 번역 없이 원제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한국어판 제목 역시 센스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때로는 순수함이 본질을 꿰뚫는다는 걸
<플립>의 줄리는 매우 사랑스럽다. 외적인 사랑스러움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내면은 줄리를 알아갈수록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매료되게 한다. 어린시절의 당돌한 줄리도 충분히 귀여웠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스스로와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구해 나가는 줄리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다.
특유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본질을 깨우치는 줄리가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을 이해하면서 으레 순수함을 잃기 마련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줄리의 성장은 중요한 건 나이도 경험도 아닌 편견일 거라는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플립>이 흔한 첫사랑 로맨스물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작으로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첫사랑’이라는 소재 속에 성장의 의미를 담았다는 점, 그리고 자칫하면 무겁고 어려울지 모르는 삶의 교훈과 진리를 아이의 시각을 통해 쉽게 전달한다는 점 때문일 것 같다. <플립>을 보고 나서 좋은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으면 결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은 한층 강화되었다.
항상 전체 풍경을 봐야 한단다.
그림은 단지 부분들이 합쳐진 게 아니란다.
소는 그냥 소이고,
초원은 그냥 풀과 꽃이고,
나무들을 가로지르는 태양은 그냥 한줌의 빛이지만
그걸 모두 한 번에 같이 모은다면 마법이 벌어진단다.
실용성에 얽매여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모르는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흔한 나무에 불과했던 플라타너스 나무가, 전체 풍경을 바라볼 줄 아는 줄리에게는 상실의 아픔을 느끼게 할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플라터너스 나무를 지키기 위한 줄리의 온몸으로의 투쟁과 저항은, 그 어떠한 계산도 없는 순수함에 감동을 느끼게 했다.
달걀 부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줄리의 모습은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떠맡기듯 하게 된 과제였지만, 최선을 다해 탐구하는 줄리의 올곧은 성정과 탄생의 신비와 삶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줄리의 모든 성장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순수한 애정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성이 담긴 달걀을 전달하는 줄리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만큼, 그 가치를 무참히 짓밟는 브라이스 가족들이 화가 났고, 그로 인해 받았을 줄리의 상처가 안쓰러웠다.
장애를 가진 외삼촌의 존재를 가족구성원으로서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진심과 사랑과 같은 정신적인 풍요의 가치를 물질적인 풍요보다 소중히 여기는 줄리가 대견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장애를 가진 삼촌을 바라보던 수많은 눈동자는 잊고 있던 나의 기억 중 하나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내가 줄리만큼 어렸던 시절, 봉사활동으로 자폐를 앓는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으로 견학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벌어졌던 돌발상황에서 아이를 향해 맹비난을 퍼붓던 어떤 아저씨가 떠오른다.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 아저씨는 자신의 독설이 향하는 대상이 ‘장애인’이라는 한 가지 특징에만 매몰되어, 장애인 이전에 ‘어린 아이’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었는데, 어느 순간 잊고 살았다는 데서 나도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느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에 휩싸여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어른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세상을 탐구하는 아이보다 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한 때는 아이였던 어른들을 반성하게 한다. 굉장한 어른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이는 전혀 아닌,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른의 시각보다 아름다웠지만, 그 순수함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보다 객관적이고 분명하게 가려낸다.
아저씨는 겉보기에는 말쑥하고 괜찮은데,
그 아래엔 뭔가 썩고 있는 것 같았다.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영화에서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거의 유일하게 화를 부르는 인물이었다. 편견과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겉보기에는 신사 같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삐뚤어진 브라이스의 아버지의 실체를 단 한 번에 꿰뚫는 줄리의 순수한 시선이 굉장히 날카롭다.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분명 좋지 못한 사람이지만,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은 그의 추한 면모가 포기해버린 꿈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자격지심에서는 분명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그러한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운가에 대한 찝찝함이 남는다.
첫사랑이 아련하고, 모든 처음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것은, 이미 겪어버린 후에는 절대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플립>을 보는 어른들 역시 사춘기 소년 소녀의 풋풋함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겠지만, 첫사랑도 그 당시의 자신도 완벽히 돌이킬 수 없기에 되려 아련해진다.
하지만 <플립>이 담고 있는 교훈들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의 그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가게는 못하지만,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되살아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결코 어렵지 않은 영화이다. 하지만 절대 가볍지는 않다. 가을이 완전히 가기 전에 잔잔하지만 묵직하고, 사랑스러운 <플립>을 한 번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김소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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