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연극이 작은 흔들림으로 다가가기를 바라요.” - ‘정희정’ 윤혜숙 연출

글 입력 2022.11.0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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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1번지 7기동인] 2022 가을페스티벌_통합 포스터.jpg

 

 

아기를 돌보는 젊은 엄마, 엄마를 간병하는 딸, 요양원에서 돌봄 받는 할머니, 요양보호사… 연극이 시작되면 무대에 선 두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넘나든다. 때로는 돌보는 사람으로, 때로는 돌봄 받는 사람으로 바쁘게 무대를 누비는 여러 모습 중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이름 같았던 ‘정희정’이라는 제목에서 순환하는 돌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활동을 마무리하는 페스티벌 ‘스트라이크’에서 <정희정>의 윤혜숙 연출은 끝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의미를 뒀다. 동인 활동은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무대에 이야기를 올리는 일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정희정>의 중심이 되는 돌봄 문제도 삶에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를 다뤄야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주제였다. 실제로 연극에는 윤혜숙 연출을 비롯해 다양한 이들의 돌봄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윤혜숙 연출은 래빗홀씨어터를 이끌며 청소년 임신 문제를 다룬 <마른 대지>, 재난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자의 삶을 그린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장애인 창작자와 함께 만든 공연 <춤의 국가> 등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지난 26일 만난 그는 연극을 보는 경험이 관객들에게 '작은 흔들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희정>을 보며 눈물을 훔치던 관객을 떠올리며 앞으로 그가 만들어갈 다양한 흔들림을 상상해본다. 

 

 

 

돌고 도는 돌봄의 구조



프로필_윤혜숙_2.jpg

 

 

<정희정>은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활동을 마무리하는 페스티벌 ‘스트라이크’의 첫 번째 공연이었습니다. 동인 활동을 마무리하는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동인 활동을 하며 혼자 했으면 안 했을 작업을 했던 게 가장 큰 경험으로 남아 있어요. 활동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관객을 만나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를 이야기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혼자라면 안 해봤을 작업’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장애인 창작자분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었던 기억이 떠올라요. 2020년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가을 페스티벌의 주제가 마주 보고 추는 춤, ‘맞춤’이었는데, 비장애인 중심인 공연 예술계에서 장애 이슈를 다뤄보는 작업을 했어요. 장애를 연극의 주제로만 다루는 게 아니라 장애인 창작자와 작업하며 현실적인 구멍을 살피고, 장애인 관객을 만나는 방법도 고민해보려 했죠. 혼자였다면 제 부족함으로 뭔가 실수하거나 상처를 드릴까 봐 두려워서 못 했을 거예요. 동인분들 중 신재 연출님이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해오신 분이라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세월호 사건을 주제로 한 작업 역시 함께여서 가능했어요. 이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작품으로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거든요. 도망가기에 딱 좋은 주제인데, 동인 작업이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정희정>의 중심이 되는 돌봄 문제야말로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돌봄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개인적인 경험이 계기가 되었어요. 2020년에 출산하고 육아를 시작했는데, 주변에 여성 연출 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분은 거의 없더라고요. 그때 연극 창작자와 양육자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건지 질문하게 되었어요. 어린 저를 돌봤을 부모님의 입장도 생각하게 되었고요. 이런 상황에 갑자기 부모님까지 돌봐야 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하던 중 희한하게도 갑자기 아버지가 대학병원에 다닐 일이 생기더라고요. 그 시기를 정신없이 보내면서 제 삶과 돌봄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꼈어요. 그 모든 게 작품에 반영되었습니다. 

 

 

<정희정>은 작가 이름 없이 ‘공동구성’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공동창작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네. 비슷해요. 한 사람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필한 게 아니라 팀원 각자가 여러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이 구성되었어요. 무엇을 넣고 또 무엇을 뺄 것인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어낼 것인가 같이 고민했죠. 특히 많이 고민하던 마지막 장면은 이유주 배우님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공연 작업을 하던 중 배우님이 공원 벤치에 앉아 실버카(노인용 보행기)를 끌고 가던 할머니가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엄마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보셨대요. 그 모습이 저희 연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돌봄의 순환과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참 묘했다고 하더라고요. <정희정>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정해졌어요. 

 

 

한 명의 작가가 쓴 게 아니다 보니 연출님과 팀원을 비롯해 인터뷰이의 경험도 작품에 많이 반영되었을 듯해요.


맞아요. 다섯 분을 인터뷰했어요. 인터뷰를 더 하고 싶었는데 사정상 못 한 분들도 계시고, 다섯 분에게 들은 내용을 담는 것만 해도 시간이 빠듯하더라고요. 돌봄에 대해서는 다들 할 말이 많은 듯해요. 저희 공연을 보고 나서 스텝과 관객분들도 자신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주셨거든요.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봄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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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돌봄 문제도 범위가 굉장히 넓은데요, 연출님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작업을 시작할 무렵 적었던 메모를 봤더니 구슬이나 순환 같은 이미지가 많더라고요. 돌봄이 돌고 돌며, ‘돌봄 받는 몸’과 ‘돌봄 하는 몸’이 내 몸 안에 다 있다는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었습니다. 좁은 범위로는 내 몸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만 넓게 보면 엄마와 나 사이, 나와 내 자식 사이에도 그런 돌봄의 순환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연극을 만드는 동안 내 몸의 역사, 내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돌봄을 주고받는다는 이미지를 계속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정희정>은 특정 인물 한두 명의 사례에 집중하기보다 '길정희'와 '양희정'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람의 돌봄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확한 주인공이 존재하고 관객들이 주인공의 관점을 따라가며 돌봄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도 좋아요. 하지만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인생 속에서 돌봄이 어떻게 전환되는지, 우리가 서로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는지 이야기하며 그 구조 자체를 들여다보는 작품은 지금까지 많지 않았기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돌봄이 유독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지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인생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다 각각 다른 이야기 같기도 한 연극에서 돌봄의 순환 구조와 그 자리를 채워야 했던 여성을 좀 더 부각하고 싶었죠.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엄마, 딸, 며느리 등의 이름으로 돌봄을 계속 맡아왔던 이들에 대해서요.


또 장면을 구성할 때 관객들의 마음이 여러 번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양원 장면을 예로 든다면,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가는 딸의 입장이다가 또 할머니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그다음에는 그 할머니를 돌보는 요양보호사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는 거예요. 돌봄과 관련된 여러 사람의 입장을 보며 관객분들이 자신의 삶과 만나는 지점을 어디서건 발견하고, 지금껏 몰랐던 다른 입장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에서 연출님이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인형이요. 인형이라는 장치를 통해 관객이 돌봄에 대한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희가 사용한 인형은 배우가 인형 옷에 팔을 끼워 인형을 움직일 수 있는 형태였어요. 배우가 팔을 끼우고 움직일 때만 인형이 살아나고 그렇지 않은 동안에는 그냥 천쪼가리라는 게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간 관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죠. 게다가 인형을 사용하니 30대인 배우의 몸과 거기 잠재된 노인의 몸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묘한 경험도 하게 되었어요. 


아쉬운 점도 있었어요. 작품을 위해 찾아보다가 돌봄 받는 사람이 꼭 어떤 수치를 견뎌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묘사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를 봤고, 거기 깊이 공감했거든요. 돌봄 받는 사람을 인형으로 표현하면 그 수동성을 강조하는 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쉬워요. 다음번에는 돌봄 받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도 좀 더 담아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본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노인들이 공동체를 꾸리는 방식으로 대안을 찾는 움직임도 있었어요. 

 

 

저도 후반부에 나온 할머니 인형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인형은 직접 제작한 것인가요?


네. 저희가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인형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배우님들을 캐스팅한 게 아닌데, 신기하게도 두 분 다 가면과 인형을 다루는 훈련을 받으신 적이 있어서 작업이 빨리 진행되었어요. 의상 선생님 도움도 정말 많이 받았죠. 전통 연희에서 사용되는 쾌자를 인형의 의상에 적용해 배우가 옷 소매에 팔을 끼워서 인형을 움직일 수 있도록 구현해 주신 것을 비롯해 많은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활자의 세계를 3차원으로 옮기는 연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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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래빗홀씨어터를 이끌고 계십니다. 정말 다양한 공연을 올렸는데 그 공연들의 공통된 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특별히 공통된 결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해요. 특정 주제에 더 깊이 있게 다가가는 팀, 다큐멘터리 연극만 하는 팀, 청소년극에 관심이 있는 팀 등 특징이 두드러지는 팀도 있는데, 저희는 잡다한 것 같아요. 형식에 공통점이 있다기보다 그때그때 관객분들과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고르고, 그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중학생 때 뮤지컬 배우를 꿈꾸셨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무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무대가 좋으셨나요? 


어렸을 때는 무대가 압도적인 조명과 음악으로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게 참 좋았어요. 지금은 좀 다른데요. 작가가 머릿속의 세계를 문자로 매개로 독자와 소통하듯이, 저는 무대라는 3차원 공간을 매개로 관객분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이 좋습니다. 제 생각이 무대를 통과해 누군가한테 간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수단과 형식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을까. 그 세계는 무궁무진하거든요. 늘 생각할 게 정말 많고, 가끔은 제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더 알고 싶고, 더 고민하고 싶은 그런 공간이 무대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연출을 맡아 오셨는데요, 앞으로 작가로도 활동해보실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11월 말에 예정된 공연은 제가 작가까지 맡았는데, 쓰면서 작가님들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좋은 글이 참 많더라고요. (웃음) 저는 제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글로 창조해 놓은 세계를 3차원으로 살려내는 일을 좋아해서 연출에 계속 집중했어요.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좋은 작가님들이 쓰신 글 사이에서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웃음)

 

 

2020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하시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전달해 주셨어요. 총알 배송의 시대에 연극을 하는 일이란 보부상 일과 같다고요. 2022년의 윤혜숙 연출님은 어떤 마음으로 연극을 하시나요?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힘이 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또, 극장에 앉아 있는 시간,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이 관객분들에게 작은 흔들림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순간을 발견한다거나,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비판의 대상에서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식으로요. 

 

 

앞으로의 일정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11월 말에 아까 언급한 연극 <세컨드 찬스>를 무대에 올릴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감사한 기회가 생기면 또 신작 작업을 하겠지만, 일단은 재공연에 집중해보고 싶어요. <정희정>을 더 발전시켜서 다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출님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개인적인 것이든 연출로서든 다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육하는 창작자라는 정체성을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고 싶어요. 여기, 아이를 키우면서 연출 작업을 하는 창작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고, 그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극장 관객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래빗홀씨어터도 지금처럼 열려 있고 유연한 창작집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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