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든 것은 미아를 위하여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9.1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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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바늘과 가죽의 시'의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1년 365일이 되기까지. 1초를 60번 지나고, 1분을 60번 지난다. 그렇게 만들어진 1시간을 24번 쌓아 하루를 만들고 365번의 하루를 겪으면 1년을 살게 된다. 그 1년을 몇 번이나 지날 수 있을지는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운명만이 안다.


모두 똑같은, 절대불변의 기준으로 시간을 살아가지만, 각각의 대상에게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다르게 체감될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주름이 생기고 머리가 희게 물드는 외적인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오래전에 싫어했던 것이 좋아지는, 혹은 그 반대로 취향이 변하는 내적인 변화, 여러 사람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삶의 지혜나 상처 같은 것들까지. 누군가에게는 빠르게 찾아오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마주하는 것조차 어려운 그 변화들.


‘나’의 변화에서 좀 더 눈을 돌리면 주위 환경이 달라지는 것 또한 느낄 수 있다. 탄생 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서 당연하게 느껴졌던 이들과 가장 예민한 시기에 마음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이들이 떠나고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존재를 만난다.


더욱 넓은 범위로 나아가면,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인간이 겨우 하루를 살아갈 동안 어떤 생명은 삶의 시작과 끝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또 어떤 생명은 한 인간이 태어나 그 후손이 죽을 때까지 숨 쉰다. 매우 짧거나 매우 긴, 그러니까 극단적인 차이를 가진 생명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반려동물과의 공생은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슬픔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변화의 속도는 다르지만 살아있는 것들이라면 결코 시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이미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며 과거의 상태에서 노화를 겪고 종국에는 소멸하고야 마는, 절대적인 법칙.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영역을 수호해 온, 영원할 것 같았던 고목이 쓰러지는 순간도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 상상의 능력이라면, 그 상상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절대적 법칙이 초월 되는가. 언제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모두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의 법칙이 붕괴되는 이야기는 소설, 영화, 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콘텐츠의 단골 소재이다.


예를 들어,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의 주인공 ‘팀’은 집안의 남자들에게만 유전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메리’와의 행복한 미래를 가꾸어가고, 드라마 ‘타임리스(Timeless)’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바꾸어 현재의 미국을 몰락시키려는 거대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기꺼이 타임머신에 올라탄다. 외계 생물을 물리치기 위해 죽음과 회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도 있다.


이처럼 시간의 법칙을 초월하는 많은 콘텐츠를 접해 왔고 누군가 내게 그중에서 한 가지 작품만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 ‘바늘과 가죽의 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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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파과’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구병모 작가의 ‘바늘과 가죽의 시’는 앞서 언급했던 몇 개의 작품들처럼 과거나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는 ‘시간 여행’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영생’,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되는 사실이다. 주인공 ‘안’은 최초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죽을 다듬고 구두를 만들어왔다. 영생, 가죽, 구두.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이야기가 그림 형제의 동화 ‘요정과 구두장이’로부터 파생되었음을 오래 지나지 않아 떠올릴 수 있었다. 다음 날 만들어야 할 구두의 가죽을 재단해 놓은 후, 잠이 든 노부부의 집으로 찾아와 구두를 완성하고 떠난 요정들, 그들이 살아온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과 그의 형제들이 ‘몸’을 얻게 된 순간은 노부부가 감사의 표시로 마련한 작은 옷을 받았을 때이다. 살갗에 스치는 섬유의 부드러움과 동시에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 또 그 바람이 천천히 데워지는 과정을 음미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동시에 시간의 유한함과 무한함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유한한 삶을 살고 안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무한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에 자신만의 구두 가게를 차리기까지, 안은 전 세계를 방랑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억겁의 시간 동안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들과 이별했다.


인간의 몸으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경험하는 것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며, 서로 다른 시간의 속도에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서 모든 것이 ‘괜찮은’ 상태 또한 영원할 수 없다.


무궁한 시간을 가진 이가 수도 없이 경험했을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 끝에 있기에, 이야기의 결말이 있기에 절정으로 달려가는 과정을 견딜 수 있다. 죽음이 있어서 삶이 값지다. 그렇다면 결말을 볼 수 없는, 죽을 수 없는 이들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믿음과 마음을 준 이들이 늙어가고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 안은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누구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다"라는 사실과 "너무 많은 인연을 마주치면 그 누구와도 매듭을 맺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 안이 교류하는 인간들은 그가 운영하는 공방에 수제화를 만들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뿐이며, 그마저도 지속되지 않는 일회성의 만남이다. 구두를 만드는 일이 안에게는 ‘삶’ 그 자체였기에 수강생들의 서툰 솜씨에는 익숙해지기 어려웠지만 "짐작할 수 없이 아득한 어딘가에 분포한 것만 같은 그 인간적인 보람, 소박한 현시욕들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자기 삶에서 배제했음에도 여전히 안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점은 ‘사라질 것을 알면서 곁에 두겠다’는 마음이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 곁에 두겠다는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은 시간에 안의 삶으로 들어와 그가 놓았던 인연을 돌아보게 하고, 삶을 사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첫 번째 인물은 안의 수강생인 시인이다. 곧 태어날 아이의 모카신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공방을 찾는 시인은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방문한다. 수선되기만을 기다리는 구두를 들고 있는 여자를 보고 안은 과거의 연인을 알아보았지만, 그리웠던 얼굴을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래간만이고 뜻밖이었다고, 

사고를 당하신 적 있다지만 거동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니 그만하길 다행이며, 

그 후로 얼마나 큰 고난을 겪었는지 

지나간 일의 세목에 대해 이야기 나눌 처지는 못 되나 

보통 사람들이 일컫는 원만한 생활의 범위 내에서 살아오신 것 같아 

그나마 안심했다고, 

언제나 당신의 행복을 빌었다고 공연한 이야기까지 하게 될 것 같아서, 

안은 저 역시 반가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p.97

 

 

늙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들킬 수 없어서, 혼자 나이 들어갈 연인을 볼 수 없어서 안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도망치고야 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젊은 시절이 희미하게만 남아있는 채로 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삶에 들어온 사람에게 안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구두를 수선해주는 것이었다.


구두를 신을 사람의 발을 본뜨는 일부터 가죽을 재단하고 약품 처리를 하는 일, 바늘에 실을 꿰어 적절한 간격과 탄성으로 조각들을 잇는 일, 마지막으로 걷는 버릇대로 상한 구두를 고치는 일까지. 이 공정은 안의 본질이었으며 안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스쳐 지나간 사람과 추억이 구두를 만드는 그 손길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더는 구두를 만들지 않고 사랑하는 인간의 구두를 위해 공방을 찾아온 ‘미아’를, 안은 온전히 환영하지 못한다. 안에게 미아는 "예전에 알고 지냈으나 이제는 지워버려야 할 이름의 목록을 열거한다면, 언제까지고 가위표가 그어지지 않은 채로 보존될 사람"이다. 같은 존재로서 서로의 고충과 행복을 이해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안과 함께 남아있을 미아의 선택을 저지하려 한다. 미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으므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서.


미아의 선택은 춤을 추는 인간인 ‘유진’과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유진은 이제야 40대에 이르렀고 그의 앞에 놓인 시간은 지금껏 살아왔던 날보다 길 테지만, 미아의 기준에서는 여전히 눈을 깜박이면 없어지는 잔상일지도 모른다.


왜 함께할 수 없는 미래가 분명한데도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 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된 아기의 모카신을 꿋꿋이 완성하고 순간의 행복을 위해 끝없이 펼쳐진 미래를 슬픔과 절망으로 채우는 것인가.


흔히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이 가치 있어 보이고, 반대인 것에 끌린다는 말이 있다. 미아가 영원이라면 유진은 소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하나하나의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반드시 선행 동작이 종결되어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수 있다. 춤을 추는 일에는 필연적인 소멸이 수반되는 법이다. 모든 순간의 죽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유진을 보며 미아는 자신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을 테다.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

 

p.149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 곁에 머물기 위해선 현재의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혼자가 되어 남겨질 두려움,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슬픔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흘려보냈다는 후회가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올 것이므로. 반드시 느끼게 될 미래의 외로움보다 현재의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미아, 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젠가 네가 혼자가 되더라도 사실은 처음부터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우리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을 머물렀다가 부서지고 사라질 세상의 모든 것을 

붙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뻗고야 마는 손을, 

변함없이 바늘을 쥐는 손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p.170

 


안은 마침내 미아에게 닿지 못할 고백을 한다. 지금까지 구두를 만들기 위해 해왔던 모든 행동과 보냈던 시간이 안에게는 필연이자 위로이자 삶이었던 것처럼, 미아의 선택도 어쩌면 마주쳐야만 했을 사랑이며 미래의 아득한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기억을 위한 것임을 이해한다. 미아가 유진을 생각하는 것만큼, 안이 구두에 갖는 의미만큼, 안이 미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미아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의 삶에 다시 들어온 인연이 아직 이 세상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았으며 무한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와 안은 과거와 같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관계든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 안이 똑같이 나이 든 모습으로 육신을 바꾸어 과거의 연인이 재현될 수 있으며, 혹은 새로운 행동을 취하지 않고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공방의 주인과 수강생의 어머니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한가지 확신할 수 있다. 이제 안에게 인간이란 그저 짧은 생을 살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유한과 무한 사이에 공허하게 서 있던 안에게 삶이란 그저 사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존재가 될 것이다. 그들과 함께라면, 단박에 미아의 길을 따라 걸을 순 없어도 아주 긴 세월 동안 무채색이었을 안의 삶에서 조금의 색은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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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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