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가 스스로 예술가로 존재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 -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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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책을 쓰던 말루프는 몇 년 전 경매에서 구매한 한 여성의 사진들을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는데, 순간 그 사진들이 범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그는 그 사진들이 애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러자 한 저명한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앨런 세쿠라가는 그에게 사진을 팔지 말고 일단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라고 충고했다.
하루에 필름 한 통씩 50년을 찍어야 하는 분량의 사진을 찍고도 그 누구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던 비비안 마이어 그리고 그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인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사진 전시뿐만 아니라 그의 미스터리한 인생을 영화화한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만들어지면서, 마이어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이어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고, 2015년 성곡미술관 이후 현재 그라운드시소 성수에서는 그의 사진 전시가 진행 중이다. 또 그의 삶과 사진에 대한 해석을 담은 도서 또한 여럿 출판되면서 이제는 사진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영감을, 그리고 더욱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린 무엇을 보는가?
우린 사진을 찍을 때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각도에서 찍을지 등 이것저것을 고려한다. 그래서 모두가 같은 것을 찍더라도 절대 같은 사진이 나올 수 없다. 찰나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본질과 빛의 우연성과 같은 것의 개입도 개입이지만, 나의 의도 나의 시선과 같이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아주 작은 일부이고 정적이지만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우린 마이어의 사진을 통해 그의 시선, 그의 프레임으로 그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린 지금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시선, 프레임으로 (tv, 신문, 인터넷)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게 실제 세상일지 모르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아 같이, 저마다 다른 일부분만 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 우기는 것은 분명 잘못됬겠지만, 우리가 여러 미디어를 통해 보는 세상은 분명 틀린 것은 아니며, 전체를 다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더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린 마이어의 사진을 통해 조금 더 세상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다. 자, 한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한번 들여다보자.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예술가는, 예술은 뭘까?
마이어의 사진은 서정적이며 완벽한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는 확실히 전문적이며, 그의 사진은 예술이다. 하지만 하마터면 묻힐뻔한 그의 삶과 사진에 대해 생각했을 때 위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런 답을 내렸다. 예술가가, 그리고 예술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구나.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전까지 예술가는 하나의 직업으로서, 예술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우린 무언갈 열심히 하거나 잘하면 보상받고 싶어 하니까. 그것은 인간의 욕구고, 직업에선 그것이 인정이니까. 하지만 마이어는 그러지 않았다.
마이어는 특별해져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이어의 사진을 보면 그는 그 당시의 거리, 생활 모습 등을 그대로를 담았다. 마이어의 사진은 지금 밖에 나가서도 볼 수 있을, 남길 수 있을 법한 사진들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워낙 연출, 후반 작업 기술이 뛰어나 말도 안 되게 '멋진' 사진들이 많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사진이라 하더라도 마이어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친근함, 따뜻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스럽다는 의미 자체도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는 요즘 사진 작품들을 보면서 입을 쩍 벌리며 놀라기도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피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뭐랄까, 현실적이지 않음에 나와는 멀게만 느껴진달까. 그래서 지금 마이어의 사진이 더욱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게 아닐까.
마이어의 사진을 지금이라도 찍을 수 있을 법한 사진이라 했지만, 당연히 그럴 법하다는 것이지 누구나 마이어처럼 찍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순간을 포착하고 카메라를 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근사한 세트장에서 멈추어 찍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느 뛰어난 하모니카 연주가가 자신이 가르치는 재능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블루스 음악가이자 하모니카 연주자인 킴 윌슨의 연주를 보러 갔다. 킴 윌슨은 단순하고 쉬운 곡인 <리틀 월터>를 연주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저건 나도 연주할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말했다.
“정말 그럴까?”
마이어가 찍은 사람들과 풍경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음악가의 수업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론상 우리도 마이어가 보았던 세상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마이어의 사진 개중엔 경계의 눈초리로 불편해하거나, 예기치 않은 감시에 불쾌해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진들이 있다. 마치 ‘누구세요? 뭐하는거죠?’하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분명 화가 난 표정이지만, 왠지 모르게 친숙함이 느껴진다.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리 포즈를 취하거나, 카메라를 향해 웃어주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상황이 상상되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분명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요즘은 초상권 침해로 짧게 지나가는 시민들 얼굴까지도 모자이크로 처리해야 하는 시대다. 지금 만약 누군가 마이어처럼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사진 찍고 있다면, 나는 분명 얼굴을 가리며 지나갈 것 같다. 하지만 과거 마이어 사진 속에 나온 사람들은 아마 자기 얼굴이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이어도 그러지 않았다. (훗날 그렇게 되긴 했지만) 나는 전공 수업에서 인권침해 보호를 위해 행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올려서는 안 된다고 주의받았기에, 사실 마이어 사진을 보면서 계속해서 이런 쪽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분명 그 당시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아님 문화차이일 수도) 어찌 됐건 그렇게 길거리의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모델로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점도, 분명 그의 사진이 매혹적이고 친근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세상이 만든 예술가,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
충분히 조명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진이 누군가에 의해 제빛을 바랐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이어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를 이해하려 하다 보니, '과연 마이어가 기뻐할까?' 더 나아가, 그녀를 주변에서 봐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그가 '화낼지도?'라는 생각을 했다. 마이어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예고편의 댓글 중에는 "그의 은밀한 열정이 세상에 떠밀려 나오다니, 슬프다"라는 댓글이 있었다.
그러나, 홀로 하는 예술도 예술이지만 보편적으로 예술은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보인 이상, 그 예술은 오로지 작가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온전히 작가 혼자, 그 예술을 완성시킬 수 없다. 가령 영화를 생각해보자. 감독의 메시지 또는 작품 제작 과정 속 많은 참여자의 의도가 어찌 됐건, 보는 이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와 비슷할 수도, 천차만별일 수도 있다. 결국엔 미술이건, 문학이건, 사진이건 모든 예술 작품은 그것을 보는 향유하는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이어처럼 훗날에 가서야 작품이 재조명, 재해석되면서 수면 위로 떠 오른 예술가들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방금 말한 예술의 최종 단계와 예술에서의 '같이'라는 가치가 다시 한번 와닿는다. 하나의 예술은 분명 끝이 없다. 예술의 최종 단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할 앞으로의 모든 사람이니까. 앞서 내가, 요즘의 사진 작품들 속에서 마이어의 사진을 특별하게 느꼈던 것처럼, 그것이 주는 의미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미들로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채워질 것이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정도는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앤디 워홀
가령 화가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캔> 그림 당시, 이게 무슨 예술이냐를 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만 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자신의 예술성을 비난하고 모욕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그 깡통 그림은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아마 앤디 워홀 또한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술의 지나친 엄숙주의 탈피', '대량 생산의 몰개성 표현' 등등... 어쩌면 앤디 워홀은 그가 의도한 것보다, 의도한 것과 달리, 훗날 사람들이 더욱 멋지게 그의 작품을 포장 해석했기에 유명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것을 향유한 사람들은 그 시대 상황 등에 빗대어 여러 해석을 하고, 작가의 의도를 추측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품을 본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는, 작가가 담으려 했던 메시지보다 훨씬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모두 그 작품의 메시지가 된다.
마빈 하이퍼만은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토록 열정적으로 만들어졌던 수십만 장의 사진들은, 그 없는 제2의 인생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야 한다. 마이어가 돌봤던 아이들처럼,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이 매력적인 것은 우리가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사진들이 우리에게 예술가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사진의 제2의 인생이라, 마이어에겐 미안하지만, 이번만은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그가 우리가 내린 결정에 행복하길 바라본다.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우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에서는 우리가 사진이라는 매체의 사용에 있어 마이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항상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녔던 마이어처럼 우리 역시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작고 환한 디지털 화면을 보며 순간의 이미지를 찍는 것과 인화는 거의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정사각형의 네거티브를 좋아하는 것마저 (인스타그램은 초기 정사각형으로만 사진을 올릴 수 있었다) 비슷하다.
하지만 사진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마이어와 우리의 명백한 차이는 우리에겐 사진은 사회적 목적이지만, 마이어에겐 개인적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은 우린 사진이 의도하지 않은 대중에게 얼마나 멀리 전달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다고 말한다.
사진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사진을 인간관계를 탐색하거나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지금 문화다. 나에게도 사진이란, 나를 표현하고 꾸미는 수단이다. 하지만 때론 진정한 내 모습을 숨기거나 나조차도 속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반대로 내가 남을 평가하는 쉬운 수단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우린 지금의 사진 한 장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안다. 가령 유명 연예인 커플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지는데, 많은 사람이 파파라치와 해커가 저지른 범죄보다 그 '사진'에만 미쳐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사진 찍기를 한 비비안 마이어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진 사용과 그 가치에 대해 울음과 고민을 안겨준다.
또 우린 명성과 유명 인사에 열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기를 얻고 싶어 하고,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 중 하나다. 그런데 이것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마이어의 사진이 세상에 나오지 않기엔 매우 아까우며,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그러한 마이어의 신비함,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과 같은 부분들에 더욱 흥분하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랑은 다른' 마이어의 독립심과 욕심 때문에 더욱 관심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가 최고의 작품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 부여한 익명성 때문이다."
- 텔레그래프
또한 책<비비안 마이어:나는 카메라다>에서 대중은 사람의 이야기, 특히 역경을 이겨낸 예술가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삶과 기이한 면모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감상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흔히들 마이어를 ‘보모 사진가’,’카메라를 든 메리 포핀스’라고 부른다. 마이어의 괴짜 같은 면은 대중이 예술가에 대해 품는 상상을, 또 어떻게 그의 이야기가 매체가 좋아하는 소재가 되었는지를, 왜 믿기 어려운 그의 삶과 작품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지를 설명해준다.
-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자신의 작품을 역사와 비평 담론에 참여시키려는 사람들의 역사가 사진의 역사라면 마이어는 이러한 부류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미술관이 소장하는 사진들은 헬렛 레빗이나 리제트 모델같이 이미 명성을 얻은 사진가의 인정받은 작품이다. 역사가 제프리 베천의 말대로 마이어는 “위대한 작품과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들의 친숙한 이야기를 망칠” 수도 있다.
- 책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어찌 됐건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스스로 예술가로 존재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를,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리라는 것과 사람들이 마이어를 가엾어하는가 동시에 존경하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우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마이어의 일화를 들으면 그는 매우 예민하고, 사회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하지만 마이어의 사진을 보면 그는 그 누구보다 세상을 가까이했다. 돌보미, 가정부, 간병인으로서 항상 방심하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했기에 어쩌면 사람과 공간을 관찰하는, 세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진가는 최상의 사진을 확보하기 위해 안전하게 같은 대상을 다양한 구도로, 여러 장 찍지만, 마이어는 단 한 장 찍었다.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필름을 아끼려던 것이었을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러한 점에서 우린 왜 마이어가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보여주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사진의 사회적 목적과 개인적 목적의 차도 여기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피사체를 뷰파인더에 끌어들여,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행위에서 그의 목적은 끝난다. 그래서 인화도, 공개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비로소 그녀의 것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책 제목 '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담고 싶은 욕망은 마이어만의 것이 아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100년도 더 지난 후 사진 작가 개리 위노그랜드 역시 자신의 원동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완전히 나를 벗어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가장 가까이 이르게 되는 순간, 그때가 가장 좋다. 가장 매력적인 순간이다.”
- 책<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사진작가에게 원동력은, 담고자 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마치 이미지와 자신이 하나가 된 것만 같은 순간인걸까? 그렇다면 마이어는 분명 그것에 중독되었을지 모른다.
큐레이터 존 자코스티는 “이 새로운 세대 사진가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술적인 측면과 미적 측면을 한층 개인적인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들의 목표는 삶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아는 것이며… 세상은 두려울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놀랍고 매혹적인 원천지로 인식된다.”
- 책<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중
책에선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란,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수행이라고 말한다. 자코스티의 말처럼 마이어는 사진으로 삶을 알고자 했으며, 자신의 삶을 (=사진도)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오늘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세상과 마주하고 그것을 이해해보는 것이 어떤가. 주체적인 당신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
마이어는 카메라뿐만 아니라 영화 필름, 휴대용 녹음기로도 세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세상을 기록하는 행위는 그의 삶의 중심이었으며, 그가 남긴 셀프 포트레이트를 통해 그의 세상엔 그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Estate of Vivian Maier, Courtesy of Maloof Collection and Howard Greenberg Gallery,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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