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서관을 좋아하세요? 下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8.11 14: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고등학교에 배정받은 나는 학교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보다 이 먼 거리를 3년 동안 다닐 생각에 막막했다.

 

중학교에서 나를 포함해 총 3명만이 이 고등학교로 배정받았기 때문에 정말 새 학기 새 출발하겠네 라는 생각으로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학교 풍경을 둘러보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멀게만 느껴졌던 등하교 길도 금세 익숙해졌고 중학교 때보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만큼 같은 반 친구들과도 빠르게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 S를 보고 떠올랐던 이미지는 말괄량이 삐삐였다. 까만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었고 깡마른 몸에 길쭉한 팔 다리, 그리고 몽실 언니가 떠오르는 단발머리는 S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친화력이 좋았던 S는 특유의 삐거덕거리는 몸짓과 쾌활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이 친구와의 수다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급식을 먹은 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자연스럽게 회전 초밥 (여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동장 뺑뺑이)을 하다가 추리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추리소설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S는 눈을 빛내며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했고 S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또 그 이야기냐며 질린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들어만 봤지 읽어 본 적은 없다고 했더니 그것도 안 보고 뭐 했냐는 표정과 함께 학교 도서관에 책이 있으니 당장 보러 가자고 나를 이끌었다.

 

   

[크기변환]books-g5eaabf2f4_1920.jpg

 

 

내가 다니던 여고는 본관과 후관으로 나누어져 있는 구조였다. 사실상 본관과 뒷방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다니며 필요한 모든 장소는 본관에 있었으므로 뒤편에 위치한 작고 낡은 후관을 갈 일은 없었다. 당연히 도서관도 본관에 있겠거니 했지만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후관이었다. 사실상 창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낡고 작은 구관의 계단을 오르니 도서관 팻말이 적힌 유리문이 있었다.

 

건물 외관만큼 작은 도서관 이었다. 대여섯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조용히 자습을 하러 온 듯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생들에겐 독서할 시간 보다는 공부할 시간이 더 중요했기에 책이 꽂혀있는 책장보다는 자습을 위한 책상들이 도서관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서관보다는 독서실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친구들의 뒤를 따라갔다. 다른 친구들은 각자 관심 있는 책장 쪽으로 흩어졌고 나는 S를 따라 일본 문학이라고 적혀 있는 책장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히가시노 게이고 책이라는 친구의 말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 예상보다 정말 많은 책들이 있었고, 심지어 발매 텀이 굉장히 짧아서 이 작가는 글이 술술 써지는 천재냐는 질문을 하니 S는 깔깔 웃으며 그게 가장 좋은 점이라고 신간을 오매불망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바로 나오니 속 시원하다는 대답을 했다. 친구의 추천을 받아 가장 유명하다는 용의자 X의 헌신과 백야행을 빌려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두 책은 내가 다시금 도서관에 발을 들이게 되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책은 유명했지만 발매 텀이 짧은 만큼 가벼운 추리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예상을 뒤집은 상당히 흡입력 있는 책이었다. 추리소설답게 술술 읽히는 내용이었지만 사건 하나하나 특색 있었고 결정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탄탄해서 몰입하며 읽기 딱 좋았다.

 

금세 두 권을 읽은 나는 다시 낡은 도서관으로 향했고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몇몇의 학생들을 지나, 게이고 책을 몇 권 더 빌려 나왔다. 책을 보며 눈물짓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며 학교에 있던 히가시노 게이고 책 도장 깨기를 끝냈고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책장들에도 시선이 향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낡은 도서관이었고 많은 책이 있지는 않았지만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는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주황빛 온도와 살짝 들어오는 햇살, 책 냄새 등은 어렸을 때 느꼈던 것과 그대로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오래된 책과 새로 들어온 책들이 섞여 있었지만 책을 빌려 읽는 사람이 적다 보니 책 상태도 깨끗한 편이었다.

 

이런 잔잔함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애틋해지는 마음도 더러 떠올랐다. 그 이후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도 주기적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차분히 도서관을 둘러보며 책들을 살피기도 하고, 자습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빌려 읽곤 했다.

 

학년이 달라지면서 문과를 선택한 나와 이과를 선택한 S는 반이 나뉘게 되었다. 복도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며 히가시노 게이고 신작이 나왔으니 읽어보라는 안부를 종종 나누곤 했다. 나를 다시 도서관으로 이끌어, 잊고 있던 도서관에 대한 애정을 떠올려주게 해준 S와는 대학을 입학하며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점 혹은 도서관 책장에 꽂힌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볼 때면 이 친구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크기변환]19930007 (1).JPG

   

 

20살을 기점으로 자취를 시작하게 된 나는 책을 구입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구입한 책을 관리하는 비용, 책을 꽂을 공간의 부족 등으로 인해 읽고 싶다 하여 모든 책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고민 앞에 E-BOOK이라는 시스템이 나타났지만, 이북으로는 도저히 책을 읽기가 힘들고 여전히 종이책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라 명쾌한 해답을 낳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의 니즈를 만족시켜줄 단 하나의 정답은 도서관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책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보고 싶은 책이 그 자리에 있고 (없다면 주변 도서관의 책 연계 시스템을 이용하거나 도서 신청을 하면 된다) 책을 향유할 수 있는 긴 기간을 제공해 주고 (기간이 부족하다면 기간 연장을 하면 된다) 그렇게 빌린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은 무조건 소장해야 한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렇다면 그 때 그 책을 구입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구입한 책은 더욱더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

 

나의 도서관 일대기는 결국 도서관에 대한 나의 애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혹시라도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중 나와 같은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면 핸드폰 지도를 켜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검색해 보길 바란다. 생각보다 다양한 공간에 다양한 모습을 가진 도서관들이 눈에 띌 것이다.

 

평일에는 밤 10시까지 열려 있는 도서관들도 있고 지하철 역사를 이용한 책 대출 서비스들도 있다. 인기가 많은 책들은 일명 북켓팅처럼 치열한 기다림 끝에 볼 수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기분 좋게 내 순서를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는 다양한 사람을 거친 책을 빌려오는 게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는 더욱 타인의 흔적을 조심하게 된다. 나 또한 충분히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새 책을 구입해 빳빳한 “나만의” 책을 읽는 기분도 사랑스럽지만, 여러 애독자들을 거쳐 나에게 온 손때 묻은 “모두의” 책을 읽는 기분도 충분히 사랑스럽다.

 

나는 오늘도 사랑스러운 모두의 독서를 하러 도서관에 갈 예정이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태그.jpg

 

 

[송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