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왜 '알탕' 사회가 됐을까?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여성을 혐오하며 남성은 유대한다.
글 입력 2022.06.3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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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알탕’이란 말을 써본다. 여주인공 없이 남자들만 대거 출연하는 ‘알탕 영화’라는 단어에서 들어봤을 이 표현. 여자를 배제한 채 남자로만 꾸려진 것들에 대한 수식어다. 알탕 카르텔, 알탕 컨텐츠, 알탕 방송 등 남녀 성비가 심각하게 불균형한 것들에 사용한다.


사실 알탕이란 표현을 특정 컨텐츠에만 쓸 필요는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이 현대 사회가 바로 알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등 시민이자 최상층인 남성이 여성과 약자를 지배하는 것. 모든 주류와 기준점은 남성이고 여성은 ‘그것이 아닌 것’으로 배제되는 것.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건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알탕 속에 살고 있을까? 알탕은 왜 이렇게 견고하고 힘이 셀까? 이 현상에 대해 명쾌하고 논리적인 이론을 제시한 책이 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도 남성 권력 구조를 비판하고 여성 혐오에 대한 통찰을 선사하는 책.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2012년에 출간돼 “꾸준히, 그리고 조용히” 읽혀왔던 저서가 얼마 전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호모소셜 – 호모포비아 – 여성 혐오


 

이 책의 모든 주장을 전개시키는 핵심 이론을 소개한다. 미국의 젠더학자 이브 세지윅의 이론을 우에노가 풀어 설명했다.


 

[호모소셜 homosocial] - 성적인 것(호모섹슈얼)을 억압한 남성 간 유대.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서로가 ‘성적 주체’임을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이다. 이 ‘남성성 인정’을 위해 여성 혐오를 이용한다.

 

 

[호모포비아 homophobia] - 호모소셜한 남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게 되는 것 = 여성화되는 것’이다. 남자 자격이 없는 남자를 추방할 때 ‘고추 떨어짐’ ‘계집’과 같은 여성화 레토릭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성이 된다는 건 성적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 아래 지배받는 성적 객체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성적 객체가 된다는 것은 남근을 ‘삽입하는 자’에서 ‘삽입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삽입에 대한 권리를 잃은 동성애자 남성은 ‘여성화된 남성’이다.

 

이성애자 남성은 삽입 권리를 상실한 동성애자 남성(여성화된 남성)과 동일 선상에 오르는 걸 꺼린다. 같은 외형을 가진 자신도 언제든 성적 객체로 추락해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결국 남성 집단이 성적 주체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호모포비아적 성격을 가지고 게이를 배척해야 한다.

 

 

[여성 혐오] - 호모소셜 집단을 결속하기 위해선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해야 한다. 그 타자로서 지목된 게 바로 여자다. “여성 = 남성이 아닌 자”로 취급하며 타자화를 공유한다.


호모소셜 집단에서 성적 주체(남자)임을 인정받으려면 성적 개체(여자)가 필요하다. 여성을 욕망하고 지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명 이상의 여자를 ‘소유’하거나 음담패설에 거리낌 없이 참여해야만 그 자격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여성 혐오―여성 멸시―는 자연스런 수순이다. 여자를 깎아내려야만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와 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즉,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다시 말해, 여성 혐오는 남성 연대의 결속을 위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왜 오랜 기간 여자는 ‘하찮은’ 취급을 받아야 했던 걸까? 그 비밀이 여기 있었다. 남성 권력을 공고히 하고 무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종식시켜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에 우에노는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 이렇게나 무르고 불안한 것이 남성의 아이덴티티다.”라고 일침을 날린다.

 

 

 

남성은 정말로 주체적인 섹슈얼리티를 갖고 있는가?


 

책은 줄곧 이 “연약한” 남성의 정체성을 꼬집는다. 특히 그 우유부단함과 예속성에 대해선 ‘음담패설’을 예로 설명한다.


 

[남자 말하기 (음담패설)] - 여성을 성적 객체화한 뒤 그것을 폄하, 언어적 능욕 대상으로 삼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의례적 커뮤니케이션. 자신이 남성으로서 얼마나 확고한 ‘성적 주체’인가를 상호 확인하는 의식이다. 특히 정형화된 의제에 대해 서로 동의할 것을 강요한다.

 

 

음담패설에 끼지 못한 남자는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여자를 당당하게 유린해야 성적 주체로서 자리할 수 있고, 그 능욕의 수위가 거칠수록 남성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이때 남자들의 대화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어떤 ‘년’에 대한 외모 평가와 ‘따먹고’ 싶다는 강간 욕망 등에 대해서다. 호모소셜한 남성은 ‘이런 얘기’ 밖에 하지 못하고, 또 ‘이런 얘기’만 해야 한다.


우에노는 묻는다. “남성은 진정으로 성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여자들은 점점 자신의 신체와 성적 경험, 그것이 주는 놀라움과 흥분에 대해 공유하기 시작했는데 그럼 남자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는가? 남자 말하기(음담패설)를 금지했을 때 남자는 대체 어떤 말하기가 가능할 것인가?


우에노는 남성의 성이 ‘빈약하다’고 말한다.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여성의 무언가를 빌리지 않고선 ‘말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호색한(바람둥이)이라는 걸 자랑스레 떠벌리고 남근의 ‘괴력’을 공공연히 과시할 정도로 성은 남자에게 훨씬 너그러웠음에도, 정작 진정한 자유에 가닿지 못하는 건 남성일지도 모른다. 깎아내릴 누군가가 있어야만 존속될 성적 주체성이라면, 그걸 진정한 주체성으로 볼 수 있을까?

 

 

 

포르노의 법칙. 남근은 정말 필수불가결할까?


 

일본 AV(Adult Video) 산업 규모는 연간 5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포르노그래피가 합법인 나라의 국민이 펼친 포르노그래피 담론은 그래서 더 궁금하다.


우에노는 일본의 전통 춘화와 현대의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유혹하는 이는 여자여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이란 규칙. 행위의 시작이 강간이었든 비도덕적 관계였든 유혹한 게 여자 쪽이어야 남자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여자가 요청하고 남자가 제공하는(혹은 남자만 제공할 수 있는) 쾌락에 젖는 것은 곧 여자의 자발적 종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 여성의 쾌락을 측정하는 지표는 무엇이냐. 바로 남근(페니스)이다. 남성 쾌락의 원천이자 여성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쾌락의 근원이라 ‘남자들이’ 여기는 상징물이다.


예를 들어 일본 춘화에서 여자의 마스터베이션과 레즈비언적 행위를 그릴 때, 그것은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젊은 처자들은 다른 남녀의 성교를 훔쳐보며 이성애로부터 촉발된 자위를 하고, 여성 동성애는 남근 모양의 자위 기구를 사용해 상대의 국소를 찌른다. 모두 ‘정상’적인 성교의 대체물이고, 그 최종 목표가 파트너(남자)와의 성교라는 점이 암시돼 있다. 남근 없는 여성 성욕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반쪽짜리 성욕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남성을 성적 자극한다. 남근이 부재하는 곳에 자신의 남근을 상징적으로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남근이 있어야만 여자가 완전한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긍지가 바로 남자들이 ‘꼴리는’ 지점인 것이다.

 

*

 

재밌는 건 남자들이 레즈비언 포르노엔 아주 관대하다는 것이다. 관대함을 넘어 보편적인 취향 중 하나가 됐다. 앞서 호모소셜한 이성애자 남성은 동성애자 남성을 배척하는 호모포비아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럼 그들은 동성애 반대론자일까? 그런데도 왜 여성 동성애 포르노를 즐기는 것일까?


여기서 호모소셜을 위해 여성 혐오한다는 이론이 다시금 확연해진다. 남성이 꺼리는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자 남성이다. 게이는 호모소셜 남성의 성적 주체성을 위험하게 하는 ‘동족’이다.


그에 반해 레즈비언 포르노는 ‘동성애자 여성 = 남자가 필요치 않고 여자들끼리 만족할 수 있는 존재 = 성소수자’가 아니다. 여성 간 성행위를 하는 여자들은 모두 남근을 구걸하며 남성을 필요로 하는 이성애 여자들이다. 지배자를 열혈이 원하고 자발적으로 종속된다는 점에서 레즈비언 포르노는 남자의 성욕과 긍지를 드높여주지 않을 수가 없다.


남근 없이는 쾌락에 닿을 수 없다는 이 논리에 대해 많은 여성이 의아해 할 것이다. 우리가? 굳이? 왜? 우에노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현실의 해부학적 남근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거의 페티시즘의 영역에 도달한 상징적 남근숭배에 가깝다. 그러나 여성은 이러한 남근숭배를 티끌만큼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섹스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보복성 성범죄 기사를 검색하고 싶다면 다음만한 키워드가 없다. “왜 안 만나줘!” 교제를 거절하거나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살인·스토킹을 당한 범죄 기사에 자주 쓰이는 관용어다. 사건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성이고 가해자는 남성이다.


성의 자유시장에서 자유 권리에 의해 거부당한 뒤 분노한 남자들은 국가를 막론하고 넘쳐난다. 이에 우에노는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원리를 알려준다. ‘섹스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먼저 성행위에 대한 기본 개념을 살펴보자.

 

 

[성행위]

- 성적 욕망을 행동화한 것.

- 타자(신체)를 필요로 하는 것 = 성관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 마스터베이션으로 나뉨.

 

 

[파트너가 있는 섹스 = 공적 영역의 섹스]

타자의 개입을 수반하는 한, 모든 섹스는 사회관계의 하나가 되며 따라서 ‘공적’인 것이 된다. 공적인 섹스에는 사회관계에 따라 적용되는 모든 시민사회의 룰이 적용된다. 성관계는 ‘프라이버시’가 아니다. 복수의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사회관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남성은 아마 성행위를 달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연애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대인 관계 스킬 부족에서 찾지 않는다. 학력, 직업, 지위, 수입, 그리고 외모 등 매력 자원의 결여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같은 피해 의식으로 스스로를 약자라 칭하는 ‘남성 성적 약자’가 등장한다. 성의 자유시장화에 따라 (연애에 성공한) 성적 강자와 (연애에 실패한) 성적 약자가 나뉠 수는 있지만 ‘인기가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성적 약자를 자청하는 건 논리가 부족하다. ‘여성 성적 약자’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추녀’나 ‘여성 장애인’ 등 ‘성적 욕망을 자극하지 않으니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진즉에 연애시장에서 퇴출당했던 여성은 애초에 목소리를 낼 권리조차 빼앗겨 버렸다.


‘성적 약자론’을 주장했던 남성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는 “섹스 상대를 구하는 시스템이 ‘자유시장화’되면 될수록 많은 남자들이 성적 약자가 되어 넘치게 된다.”고 말했다. 왜 유독 남자들만 약자가 되는 걸까? 남과 여, 딱 두 개의 성별이 만나는 것뿐인데 왜 한쪽만 위기에 처하는 걸까?


이는 그동안 남자들이 여자와 결합하는데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았고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성행했던 ‘전원 결혼 사회’는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도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척 아주머니가 중매 자리를 구해오던 좋은 시절’이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결혼을 하고 성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이 자유시장화됨에 따라 남성도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 여자가 자유 권리를 갖고 거절이란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물론 남자가 이 거절을 존중해주진 않는 듯하다). 여자는 스스로 원하는 남자를 만나고, 호감을 얻지 못한 남자는 연애하지 못한다. 이런 남자들은 여자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불쾌해한다.


그래서 “이 접근 과정을 금전을 매개로 단숨에 단축해버리는(즉,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없는 자도 성교섭이 가능한)”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우에노는 이것을 일종의 ‘강간’이라 명명한다.


이 같은 상식(타인의 신체에 접근하기 위해선 예의와 호감을 갖춰야 한다는)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엔 역시 여성 혐오―여성 멸시―의 감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내가 지배하고 수발 받아야 할 대상에게 오히려 정성 들여야 하는 것. 동등한 주체로서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에노 말하길, “커뮤니케이션이란 대인 관계의 다른 이름이고, 당연히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길’ 리도 없다.” 본인이 성적 약자라는 것에 분개한다면 폭력을 저지르는 대신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길러야 함이 마땅하다.

 

 

 

'괜찮은 여자'가 되려다 '병든 여자'


 

우에노는 ‘병든 여자’를 마지막 챕터로 선택했다. 칼럼니스트 아마미야 마미의 저서 <병든 여자>를 기반으로 써내려갔다. 여자의 몸으로 AV 평론가가 됐다는 아마미야는 ‘병든 여자가 되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 십대 시절 외모의 정치 게임에서 패한 뒤 스스로 연애할 자격도 섹스의 대상이 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그렇게 반포기하고 살던 차에 여장(화장, 치마와 구두 등 흔히 말하는 코르셋)이란 코스프레를 하자 드디어 남자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남성에 의한 가치매김과 업신여김 때문에 갈수록 자존감이 낮아진다.

 

세 번째, 욕망의 시장은 ‘몸을 내주는 여자’와 ‘이 정도 코스프레에도 쉽게 넘어가는 남자’들이 주고받는 모멸로 가득 찬 게임이다. 나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건 남자로부터 욕망 받을 때뿐이다. 그 어리석음과 한심함에 구역질을 느낀다.

 

넷째, 그 대상화에서 벗어나 명예남성이 되기로 한다. 프로 AV 평론가가 된 그녀는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를 평가하며 그 성 착취에 일조한다. 하지만 진정한 남성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뭘 좀 아는 여자’, ‘같은 여자라도 이 친구는 다르다’는 칭찬 속엔 여전히 여자라는 배척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웃픈 사실이 있다면, 여자의 성을 평가하는 권력자 위치에 올랐음에도 오히려 아마미야는 AV 여배우에 부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청초한 외모와 커다란 가슴으로 남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녀들의 화려함에 압도당했’노라 고백한다. 결국 그녀는 남성이란 성적 주체가 될 수도, 그들의 성적 객체로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여자는 남성에게 성적으로 욕망받아도 상처 입고 욕망받지 않아도 상처 입는다."
 


이렇게 병들어버린 아마미야는 메스꺼움, 혐오, 고통과 같은 강렬한 신체적 반응을 겪는다. 충분히 괴로워하고 난 후에야 그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밝힌다. 그건 ‘굳이 남성들에게 욕망 받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남자에게 욕망당하든 당하지 않는 당신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그렇게 외쳐왔다."
 


이 책은 남성 중심 사회의 존속을 위해 여성 혐오가 악용되고 있었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이브 세지윅의 [호모소셜 – 호모포비아 – 여성 혐오] 이론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예시를 대입한다. 남성의 연약한 성적 주체성, 성 자유시장에서 대인 관계 기술의 필요성, 남근에 대한 집착과 한 병든 여자의 고백까지. 이 외에도 가부장제 가정과 여학교, 직장 등의 단체 생활에서 대물림되는 여성 혐오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 긴 설파 속 우에노가 꼭 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유추해 보건데 아마,

 

첫째, 적을 알아야 나를 안다. 여성 혐오란 사실 성적 주체로서의 권력을 잃을까 아등바등했던 남성의 수작질이었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나(여자)조차도 남성 시선을 내면화한 탓에 자발적 성적 객체로 행동하고 있었다는 걸 인지한다.


둘째, 남성의 성적 욕망 대상이 되고 싶다는 바람. 그들로부터 받는 인기가 곧 성공이라 착각했던 과거… 같은 건 모조리 갖다 버려도 ‘괜찮다’라는 조언일 것이다.


우에노 지즈코의 문단 하나를 통째로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그녀처럼 나도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푼돈 때문에 속옷을 벗지 마시길.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앞에서 다리를 벌리지 마시길. 남자들 분위기에 휩쓸려 벗지 마시길. 옷 한번 벗는다고 인생 바뀌지 않으니 착각하지 마시길. 남자에게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남들 보는 앞에서 섹스하지 마시길.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들뜨지 마시길. 남자의 승인에 의존하며 살지 마시길. 남자의 둔감함에 웃는 얼굴로 대하지 마시길. 솔직한 감정을 억압하지 마시길.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를 폄하하지 마시길."

 

 

[이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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