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를 싫어하지 않게 되어서 [문화 전반]

빗방울의 속삭임
글 입력 2022.06.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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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비를 싫어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왜인지도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비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리고 삶을 번거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맑고 푸른 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좋았다.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이고 세상이 가진 고유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 빛이 사라졌다. 찬란함이 사라지고 우중충한 색깔들과 꽉 막힌 하늘만이 남았다. 강한 바람은 머리칼을 어지럽게 헝클어뜨렸고, 번거로이 우산을 들고 길을 걷는 동안 신발과 바지와 발목은 축축한 찌꺼기 범벅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비 오는 날이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아니, 생각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전히 비와 바람과 우산은 나를 성가시게 만들고 잿빛 하늘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덮어버렸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몇 번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비 오는 날의 풍경과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들이 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대표적인 두 번의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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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쫄딱 젖은 날



비가 오리라는 소식을 들은 날은 꼬박꼬박 우산을 들고 나서기 마련이다. 강한 비바람으로 결국은 쫄딱 젖게 되더라도, 언제나 비 오는 날에는 형형색색의 우산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가로막고 있다.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필사적으로 우산 손잡이를 손에 꼭 쥔다.

 

그런데 그날은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전혀 확인하지 못했다. 일정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건물에서 나왔는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방향의 상점 캐노피로 뛰어들었다. 마찬가지로 비를 피해 급하게 뛰어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조금 기다리면 그치겠지라는 심정으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비는 그치기는커녕 보란 듯이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면 우산을 파는 드럭스토어가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그 길을 건너면 아무리 빠르게 뛰어간다고 해도 흠뻑 젖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전혀 없고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결국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4번째 바뀌는 모습을 본 순간 전력 질주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흠뻑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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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사서 여전히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들 앞을 의기양양하게 지나갔다. 한층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며 조금 전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자 생각보다 비를 맞은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신났던 것도 같았다. 드럭스토어로 가는 길, 흠뻑 젖어 드는 비를 맞으며 신나게 횡단보도를 건넜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을까? 사람들은 비만 보면 이를 피하려고 애쓴다. 물론 비를 맞았을 때의 불편함과 뒤처리를 생각하면 비를 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비를 맞았을 때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비를 피하기보다는, 그저 비를 피하고 싶어서 비를 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왜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 질문은 무언가 생각의 틀을 깨는 느낌이었다. 사실 ‘비를 맞으면 안 된다’는 법칙 따위는 없다. 그저 언제나 그랬듯이 비가 오면 우산을 써서 비를 막았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 없는 행동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비에 흠뻑 젖었던 시간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비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낯설게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때 내렸던 비는 마음껏 젖어도 괜찮은 자유였다. 동시에 당연하게 나를 속박했던 무언가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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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동산



친구와 놀이동산에 갔는데 날씨가 맑지 않고 비가 온다면, 아마 대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을 것이다. 그날은 다행인지 실컷 놀고 난 후 집으로 가는 버스로 돌아갈 때 즈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급하게 아무 상점으로 뛰어들기는 했으나, 버스까지 적어도 10-20분은 걸어가야 했다. 우산을 새로 살까도 생각했으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캐릭터가 그려진 우산을 이만 오천 원이나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친구와 그 쏟아지는 비를 용감하게 맨몸으로 헤쳐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살짝 뛰어가다가 이내 흠뻑 젖은 채로 속도를 늦춰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도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을 무사히 걸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물이 뚝뚝 흐르는 옷을 대충 짜고 버스에 앉았을 때에는 몹시 찝찝했고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폭우 속을 몇 분 동안이나 걸어왔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즐거웠던 감정이 가장 크게 남아있다. 비를 맞는 순간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꺄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부러 비를 맞고 싶어서 맞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에 흠뻑 젖어야만 버스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절망스러웠으나, 막상 비 오는 놀이공원에서 마음껏 비에 젖으며 친구와 버스로 가는 길에는 그저 웃음이 나고 어쩐지 조금 들떠있었다.

 

지금도 4-5년 정도 지난 그 기억을 떠올려보면 무슨 놀이기구를 타고 무엇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빗속을 한참이나 헤치면서 걸어왔던 기억은 몹시 힘들었던 동시에 너무나 즐거웠던 추억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친구와 함께 비에 흠뻑 젖었던 경험은 그 어느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 새롭고 강렬한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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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싫어하지 않게 되어서



나는 비를 언제부터 피하게 된 것일까. 언제부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우산을 펴들었을까? 어렸을 적에는 비가 와서 물이 고인 웅덩이만 보면 첨벙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웅덩이를 밟을까 조심하며 옆으로 돌아서 갔다. 요즘 내리는 비는 산성비라 맞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소리를 어릴 적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우리가 마음 놓고 물을 뒤집어쓰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주 개인적인 공간인 욕실에서 홀로 샤워를 하거나, 워터파크나 수영장에서 약품 처리가 된 인공적인 물을 작정하고 즐기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물을 싫어하고, 피하고, 통제하고 싶어 했을까. 사람 몸의 70퍼센트는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드넓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아보면 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정신없이 사나운 바람은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스쳐 가는 해소의 바람이 된다. 저 멀리까지 뻗어있는 먹구름은 때로는 울고 싶은 내 마음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감각적으로도 굉장히 강렬한 경험이다. 비가 내리는 소리, 쏴아-. 비를 맞을 때 피부에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의 경쾌하고도 물기 어린 촉감. 차갑고 시원한 온도. 비에 젖은 흙에서 올라오는 자연의 냄새. 푸르게 푸르게 회색빛으로 한 층 덮어놓은 듯한 세상의 색감. 금방이라도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

 

그래서 비에 젖은 날은 쉽게 잊기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감이 살아나며 괜히 마음도 들뜨는 기분이 든다. 이색적인 경험이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비가 흠뻑 내리지 않았다면, 과연 ‘그 장면’이 그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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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늑대의 유혹> 포토

 

 

원래는 비를 싫어했다. 그러나 내 팔과 목덜미에, 이마와 손등에 우연히 떨어진 빗방울은 질문을 던졌다. 아주 가끔 비에 쫄딱 젖을 때마다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찬란한 태양을 가리는 무거운 하늘의 매력을 발견했다. 빠르게 몰아치는 바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멀리까지 드리우는 빗방울의 속삭임을 듣는다.


이제는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가다가 가끔 아무도 없을 때 슬쩍 우산을 내려본다.

 

시원한 비를 느껴본다.

 

비 오는 날도 한 번쯤은 사랑해보려 시도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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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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