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실제와 환상의 뒤범벅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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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신 분들을 대상으로 한 감상평입니다.
며칠 전 톰 크루즈가 한국을 방문한 소식을 보았다. 그의 새 영화 개봉, 그리고 한국 방문 일정에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도 필자는 이 시점에서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일드 셧(eyes wide shut)>(2000)을 보았다.
이 작품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보았던 주제는 바로 실제와 환상, 그리고 그 둘의 관계였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적이라는 점에서 환상, 꿈, 상상, 기억을 거의 같은 말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1. 실제와 환상의 3가지 양상
이 작품에 나타난 실제 또는 환상(=상상, 기억, 꿈)을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실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상상’, 즉 빌 하포드(톰 크루즈)의 아내 엘리스(니콜 키드먼)의 상상이 있다. 그녀는 작품 초반에서 빌에게 한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의 내용은 예전에 만났던 한 장교가 자신을 유혹했다면, 자신은 빌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장교와 함께 떠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후로 빌은 계속해서 앨리스와 그 장교의 불륜을 상상하게 된다. 여기에서 엘리스의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는, 실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한 ‘상상’이다.
두 번째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있다. 이는 빌 하포드가 겪은 파티인데, 그 파티는 ‘실제로’ 빌이 겪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파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실제로 그 파티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으며, 사람들은 그 파티에서 육체적인 쾌락을 즐겼다. 많은 사람이 함께 공유한 이 파티의 경험은 자명하게 ‘실제’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있다. 빌 하포드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파티를 직접 보고 듣고 겪었으며, 그 일은 많은 사람이 함께 겪은 실제였다. 그러나 파티가 끝나고 나서 그 파티가 물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증거는 찾기 쉽지 않다. ‘실제’인 파티가 끝나고 윌리엄에게 남은 것은 그 파티에 대한 ‘기억’에 가깝다. 기억은 보이지 않고 물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첫 번째로 살펴봤던 ‘상상’과 비슷하다. 다만 첫 번째의 상상은 실제 사건에 기반한 것이 아니지만, 이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기반하고 있다.
2. 뒤섞이는 실제와 환상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자꾸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실제 삶과 환상, 무형의 꿈과 그것이 실제 세계에 미치는 물질적인 영향력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몹시 흥미로웠다.
우선 첫 번째 엘리스의 ‘순수한 상상’을 생각해보자. 그녀의 상상은 정말로 실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은 실제 세상에 영향력을 미쳤다. 엘리스가 외도를 하는 ‘상상’만 했음에도 그 상상은 빌 하포드와 엘리스의 관계에 실제로 영향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빌 하포드가 자꾸만 떠오르는 아내의 외도에 대한 상상 때문에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 파티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상상’은 결국 빌이 파티에 참여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상이 현실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어떤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간에 엘리스가 꾸는 꿈은 이렇게 상상과 실제의 복합적인 관계에 더욱 사실성을 불어넣는 것 같기도 하다. 앨리스는 빌이 파티에 참여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빌이 겪은 파티와 너무나 겹쳐 보이는 꿈을 꾼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그 파티를 정확히 꿈에서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저 우연일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앨리스의 꿈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꿈(=환상, 상상, 기억)과 실제의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빌이 겪은 ‘실제 파티’와 그에 대한 그의 ‘기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빌은 실제로 파티를 보고 느꼈음에도, 익명의 파티 주최자는 그 경험을 없던 일로 묻어두라고 한다. 실제로도 다음날이 되자 파티의 흔적은 아주 미묘한 잔해들만으로 나타날 뿐, 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파티의 주최자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꿈’으로 묻어두라고 말한다.
그런데 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기억’으로 묻어두어야 할 사건을 계속해서 ‘실제’로 끌어올린다. 그는 그것을 위해 파티와 엮여있는 인물들을 추적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피아니스트 친구를 찾아가고, 실제로 살아 숨 쉬며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여자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나 이렇게 ‘실제’했던 사람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실제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피아니스트 친구는 빌이 찾아가기 전 파티 주최자들에 의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여자는 약물 중독으로 사망해 시체 보관소에서 발견된다.
‘실제’를 그저 ‘꿈’으로 묻어두라고 협박했던 파티 주최자는, 이렇게 빌이 자꾸 그 ‘꿈’을 ‘실제’로 불러일으키려 하자 오히려 그 파티가 ‘실제’였음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그를 협박한다. 헛짓거리는 그만두라는 편지(손에 잡히는)가 빌의 손에 쥐어지고, 잃어버렸던 가면(물리적으로 존재하는)이 다시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파티를 ‘꿈’으로 은폐시키기 위해 오히려 그 파티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파티의 ‘실제’를 긍정하는 경고는 그 파티가 빌에게 ‘실제로’ 무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공포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빌은 그 파티를 그저 ‘꿈’으로 묻어두지 못한다.
파티를 겪기 전과 후의 빌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파티를 겪기 전 그가 ‘창녀의 집-술집-의상 가게’를 들렀던 것처럼 파티를 겪은 후에도 그는 ‘창녀의 집-술집-의상 가게’를 들린다. 하지만 창녀는 집에 없었고, 술집도 문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주변은 미묘하게 그러나 완전히 달라져 버렸고, 그의 마음과 태도 역시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를 달라지게 만든 것은 실제로 일어난 그 ‘파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빌이 파티 이후 충격을 받고 감쪽같이 끝나버린 파티의 실체를 추적해나가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이유는 실제 파티 때문이었을까, 기억 때문이었을까?
파티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면, 그는 피아니스트 친구의 행방을 쫓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사라진 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파티에 갔던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티 자체가 아니라, 그 파티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사실 파티 자체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공유되는 기억, 잊지 못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존재했던 것,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보이지 않는 기억 중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3. 남겨진 질문들
작품 끝부분 즈음, 빌은 결국 실제 세계에서 빅터의 입을 통해 그 파티가 꿈이 아니었으며,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시인하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느 정도 의문을 해소하는 듯하다. 또한 결말에서는 그저 그 엄청난 사건이 빌과 엘리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평소처럼 살아가자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김빠지는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넘어가는 것 외에 인생에서 엄청난 사건을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그 기억은 영영 빌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빅터는 빌에게 말한다.
Bill, suppose I told you that everything that happened to you there, the threats, the girl’s warnings, her last-minute intervention, suppose I said that all of that was staged, that it was a kind of charade, that it was fake.
빌, 이러면 어쩌겠나? 거기서 있었던 모은 일이, 협박과 여자의 경고와 마지막 순간의 중재나 모든 것들이 전부 꾸민거라면? 하나의 게임이었고 가짜였다면?
하나의 이벤트가 그전과 후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드는데 그 이벤트를 그저 ‘fake’라고 치면 어떨까? 무엇이든 간에 그냥 기억 속에 묻어두면 어떨까?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이 이벤트를 그저 꿈으로 묻어둘 수 있는가?
실제로 일어난 일,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상상). 이 세 가지는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구분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구분이 가능하기는 한가.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
눈을 질끈 감으면(eyes wide shut) 우리는 꿈을 꾼다. 눈을 감고 벌어지는 일들은 꿈일까, 진짜일까? 그렇게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 꿈은 그저 전혀 없던 일에 불과한 것일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상만이 실제라고 할 수 있을까? 꿈과 기억은 완전히 비물질적인데 그것이 물질적으로 잔해가 남아있기도 하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기묘한 것 같다.
만약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꿈은 실제 사건을 일으키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꿈으로 변하고 꿈은 실제 사건을 일으키고.....
[정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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