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NFP의 상상 4

SS501과 나시고렝
글 입력 2022.05.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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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예쁜들, 너보다 예쁠까.

 

민트색 벽에 쓰인 글귀가 퍽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봐도 인도네시아 요리를 파는 식당에 붙어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Y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기 맞아? 잘못 온 거 아냐?

-아닌데, 여기 맞는데...?

 

교환학생 친구에게 현지 식당 못지않은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알아 왔다며 자신 있게 앞장섰던 Y도 주춤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와인 잔으로 장식된 선반, 새까만 혈관이 여기저기 박힌 대리석 테이블과 인조 잔디가 어설프게 깔린 테라스는 로제 크림 파스타 따위를 파는 대학가의 양식당을 떠오르게 했다. 테이블에 놓인 칠리소스가 아니었다면 곧장 발걸음을 돌렸을지도 몰랐다. 때마침 인기척을 느끼고 나타난 인도네시아 출신 사장님 덕에 우리는 남은 의심을 거두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메뉴판은 ‘포장 천원 추가’라는 문구 외엔 모두 인도네시아어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려 둔 번역본을 보며 어렵사리 렌당과 닭 구이를 곁들인 나시고렝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사장님이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에는 둘만 남겨졌다. 정적 속에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음료수가 가득한 냉장고, 테이블에 놓인 진한 갈색의 생선 소스, 때마침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이국적인 향. 그러나 이들은 키치한 실내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한 채 상당한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여기 진짜 특이하다.

-그러니까.

-가게 이름 들었을 땐 완전 현지 느낌일 줄 알았거든? 근데 그냥 학교 앞 와인바 감성인데?

-우리 새내기 때 이런 감-성 인테리어 많았잖아. 그때는 예뻤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가게 나간 자리에 그대로 들어오셨나? 아무튼 추억이다.

-이게 진짜 K-인테리어지.

 

한창 이 공간의 기묘함을 논하던 찰나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손님이 오기 시작하자 음악을 튼 모양이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노랜데? 나는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는 멜로디를 들으며 한껏 인상을 찌푸리다가, 후렴이 나오자마자 접었던 얼굴을 확 펴며 Y에게 소리쳤다.

 

-와, 너 이 노래 알아?

-왜? 뭔데?

-이거 SS501 노래잖아. 우리 사촌 누나가 진짜 줄기차게 들었었는데.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우리 초등학교 때 나온 거 아냐?

-아마 그럴걸? 그냥 멜론 차트 돌려서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아닌데, 사장님이 좋아하시나?

 

SS501의 스노우 프린스를 시작으로 슈퍼주니어, 동방신기의 노래가 차례차례 나오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케이팝 좀 들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노래도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추억의 노래들이 우르르 쏟아지자 흥이 오른 우리는 입을 뻐끔거리며 소리 없는 콘서트를 열었다. 한없이 현지의 맛에 가깝다는 인도네시아 음식점에서 싸이월드 감성에 젖을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사장님이 보통 고인물이 아닌데?

-혹시 케이팝 덕질하시다가 한국까지 온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어. 나 어릴 때 캄보디아 갔다가 식당에서 슈퍼주니어 노래 들은 기억이 있거든? 그쪽에서는 그때도 케이팝이 나름 잘 나갔을걸.

-그럼 나름대로 근본 있는 조합이네.

-사실은 이게 진짜 현지 감성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솔직히 나무 불상이나 라탄 조명 같은 거 좀 짜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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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식탁에 렌당과 나시고렝이 놓였다. 음식들이 성기게 담긴 그릇에서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올라왔다. 영 믿음이 안 가는 생김새였지만 그 무심함이 역으로 이곳의 로컬리티를 방증하는 것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던 렌당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코코넛 향이 은은하게 올라오는 장조림 같은 맛이 매력적이었고, 정체불명의 양념이 올라간 닭이 곁들여진 나시고렝은 한술 뜨자마자 진한 감칠맛 사이로 낯선 매운맛이 기분 좋게 퍼졌다. 인도네시아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게 현지의 맛이 아니라면 세상에 더는 믿을 게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혀에 점점 쌓이는 매운맛이었다. 남국의 매콤함은 음료수를 연신 들이켜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불어나는 고통에도 나시고렝을 멈출 수 없었던 우리는 피 묻은 칼날을 연신 핥아대는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자비 없는 이국의 매운맛이 맹렬하게 혀를 때리는 사이, 머리 위에 놓인 스피커에서 민효린의 숨은 명곡 터치 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숨을 뱉을 때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인도네시아의 매운맛에 흥겨운 우리 가락이 더해지자 나는 전에 없던 황홀경을 느꼈다. 밀교의 의식이 펼쳐지는 듯한 이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간 나는 외식 사업가들에 의해 매끈하게 기획된 현지 감성에 놀아나고 있었구나. 그들이 만들어낸 그럴싸한 시뮬라크르 속에서 안락하게 쌀국수를 홀짝이며 이게 현지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구나. SS501과 나시고렝, 진짜배기 인도네시아 음식과 2000년대 케이팝, 어쩌다 만났는지 모를 극한의 로컬리티가 뒤엉켜 춤추는 이태원의 작은 음식점에서 나는 보드리야르가 부르짖었던 시뮬라크르의 바깥을, 본 적 없는 실재를 집어삼킨 거대한 가상의 균열을 보고야 말았다. 아, 나는 이렇게나 옹졸한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식사를 마무리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 사장님께 나는 격양된 목소리로 정말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가게를 나서기 직전 물었다. 혹시, 음악은 사장님이 고르시는 건가요?

 

-아뇨? 그냥 아무거나 트는 건데요?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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