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펙터클'이 된 '비극' 속 실재하는 삶 [도서/문학]

소설 <므레모사>가 그려내는 비극 속의 삶
글 입력 2022.03.1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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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의 인사 ‘I see you(나는 당신을 봅니다)’는 ‘이해’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 인사는 누군가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보며,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 사이 존재하는 의미의 간극


 

‘보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 무언가를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을 구분한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불균형해진다. 특히 ‘보여짐’의 대상이 된 존재는 그 자체의 본질이나 의미와 상관없이, 그것을 보는 주체들에 의해 무언가를 재현하는 ‘표상’이 되고, 단지 ‘구경거리’로 소비된다. 이렇게 (사회적인 배경 아래) 대상화된 이미지를 ‘스펙터클(spectacle)’이라고 한다. ‘스펙터클’은 그저 보여질 뿐, 그 자체로 이해될 순 없다.

 

‘스펙터클’이 잘 드러나는 예시 중 하나는 ‘관광’이다. 애초에 무언가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에 의해, 여행지는 그것이 가지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나 그 속에 존재하는 현지인의 삶과 동떨어져 쉽게 대상화될 수 있다. 특히 긴 시간에 걸쳐 고통의 흔적을 남기는 재난이나 비극의 현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스펙터클’로 소비되곤 한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므레모사(2021)>도 생화학 무기 공장 화재로 화학물질이 유출되어 폐허가 된 '재난의 현장'에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 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의 장소'가 된 ‘므레모사’를 그린다.

 

 

[꾸미기]므레모사 대표이미지.jpg

 

 

‘다크 투어리즘’은 반성과 교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므레모사> 속 ‘다크 투어리스트’들은 ‘므레모사’에 온 이유를, ‘날것의 비극을 통해 자신의 비극이 별거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여행 경험을 콘텐츠로 만들어 구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단한 기사를 쓰기 위해’라 밝힌다. 이러한 여행에서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공존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말에서 언급되었듯 <므레모사>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이다. ‘므레모사’에 닥친 끔찍한 비극과 그곳에 다시 돌아온 ‘귀환자’들의 모습은, ‘낯선 비극’이 주는 자극을 기대했던 여행자들에게 ‘스펙터클’로 소비될 뿐이다.

 

 

 

‘스펙터클’이 된 비극 속 실재하는 삶


 

비극이 ‘스펙터클’이 되는 순간, 비극 속에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지워지거나, 또 다른 스펙터클이 된다. <므레모사> 속, 귀환자들의 현실을 배제한 채 '스펙터클'로서만 '므레모사'를 소비하는 여행자들을 보면, 우리가 사회적인 참사나 비극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역시 거대한 재난과 비극에 큰 관심을 두다가도, 정작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고, 지금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금방 무관심해한다. 심지어 그 비극 속에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현지의 자극성이란, 대개 만들어진 자극성이거든.

아무리 비극의 장소라고 해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자극적이기란 쉽지 않지.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에 무슨 자극성이 있겠어?

그런데 이 렘차카를 둘러보니, 아직 므레모사에 살고 있다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극적으로 포장할 요령을 익히지 못한 듯해.

이렇게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걸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만.

 

pp. 63-64. '헬렌'의 말

 

 

어쩌면 헬렌의 말대로,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는 '비극'과 달리, '삶'은 비극 속에서조차 계속되고 반복되는 속성 때문에 그 존재가 쉽게 지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극으로 인해 사람들이 받는 피해와 고통이 사소하다거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로 소비되는 비극은 그 안에 내포된 위험이 희석되고 다듬어진 채 사람들 앞에 놓이는 반면, 여전히 그 비극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비극 때문에 고통받고 위협받기도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참 효율적이죠.

지속적인 자극이 반복되면 그걸 그냥 배경 잡음으로 처리해 버리니까요.

소음이 지속되면, 소음 자체를 감각 처리 기관에서 음소거 해버리는 셈이에요.

냄새도 마찬가지고요.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이 냄새의 존재를,

그리고 어떤 소리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것과 함께 너무 오래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그 배경 잡음은 절대 사소하지 않아요.

그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죠.

그리고 때로 그것은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포착될 수 있습니다.

 

p. 79. '레오'의 말

 


강렬한 감정과 감각으로 다가왔던 우리 곁의 비극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비극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지 못한다. 이렇게 비극에 무뎌진 사람들은 처음부터 비극이 없었던 것처럼, 비극 속의 사람도 장소도 빨리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정작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바람은 오히려 비극의 고통이 발화(發話)되는 것을 막고,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극복하는 '꾸며낸 모습'을 보여줄 것을 강요한다.

 

 

 

비극을 대하는 딜레마 : 비극 속에 멈춰 있을 권리



 

나는 두 개의 오른쪽 다리를 가지고 걸었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부딪혀 내 균형을 잃게 했다.

서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그것을 통증으로 구체화했다.

나는 날렵하게 도약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도 매 순간 휘청거렸다.

다만 그것을 이를 악물고 버텨,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을 매끄러워 보이도록 만들 뿐이었다.

(…) 

하지만 나는 원래의 감각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나의 신체는 너무 많이 변형되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신경 의족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일어설 때, 걸을 때, 뛸 때, 도약할 때 나는 매번 나의 의족과 원래의 다리를 동시에 통제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매 순간 그림자는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기계다리와 그림자가 충돌을 일으켰다. 그 충돌은 날카로운 통증으로 살을 파고들었다.

숨을 쉬듯이 움직이는 법을 잃어서 나는 괴로웠다.

 

pp. 166-167.

 

 

<므레모사>의 주인공이자 한쪽 다리를 잃은 무용수인 ‘유안’은 잃어버린 한쪽 다리가 ‘그림자 다리’가 되어 존재하는 것 같은 고통을 계속 느낀다. 하지만, 그의 연인인 '한나'조차 '이미 잃어버린 것은 잊어야 한다'라며 회복을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유안은 ‘그림자 다리’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척, 비극에서 벗어난 듯 괜찮은 척을 하게 된다. 한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유안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감동한다. 결국 ‘유안’의 고통은 온전히 이해되기보다는, ‘스펙터클’이 되어 소비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 p.175.

 

자신을 가렸던 천을 모두 벗어던지고 굳어버린 몸을 그대로 드러낸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이 보였다. 정물처럼 자리를 지키는 그들의 눈은 느리게 깜빡이고 입은 천천히 움직여 무언가를 지시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복무하는 사람들이 있다. 움직임과 멈춤의 질서가 뒤바뀐 이 공간.안은 한 번도 이곳에 속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곳을 마치 자신의 고향처럼 느낀다. - pp.182-183.

 

 

비극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비극을 잊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인지, 비극 속에 멈춰 있을 것인지', 딜레마에 놓인다. 많은 사람들은 전자의 방식이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여기지만, 책을 읽으며 ‘비극 속에 멈춰 있을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비극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그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도, 비극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외면하다가 똑같은 비극을 마주하거나 더 곪아버린 상처에 고생하는 것도, 모두 비극을 마주하는 건강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비극은 이미 일어났고 그 비극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비극의 고통과 영향을 단지 부정하거나 가려버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질 수는 없다. 이 딜레마의 정답이 무엇인지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미 존재하는 비극의 그림자를 강박적으로 잊고 지우는 것은, 상처의 치유책도 문제의 해결책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한 후에야 어떻게 비극을 마주해 가야 할지 보이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차원의 비극과 개인적 차원의 비극은 모두 누군가에게 깨달음이나 영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이 함께 비극을 기억하며,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통해 사회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누군가의 비극은 쉽게 ‘스펙터클’이 되어 버린다.

 

 

나는 나의 고통을 팔아서 생존했고, 때로 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모멸감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도약해야 했다. 나는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은 강인해요. 당신의 움직임이 나에게 영감을 줘요.

어느 순간부터는 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더는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질문도 그만두었다.

 

pp.168-169

 

 

'스펙터클'이 된 비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극의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다시 되뇌이고 전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를 통해 누가 어떤 이익을 보더라도, 결국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것과 자신의 불행을 파는 것, 어느 쪽도 '행복'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비극 속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각각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비극'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를 함께 모색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비극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비극을 통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첫걸음은 비극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나아갈 것인가, 멈춰 있을 것인가'라는 딜레마 앞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므레모사> 속 '유안'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외부의 판단이나 편견에 따라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 속에 실재하는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정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결정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해와 관용이 존재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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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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