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상처 받을 바에는 고독할래

글 입력 2022.01.2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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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소리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무선 이어폰의 탄생 이래로 귀는 이전보다 쉴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식사를 하면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거나 길을 걸으며 음악을 듣는 등 사람들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무언가를 듣고 있다. 나부터도 그렇다. 어딘가를 걸으며, 또 무언가를 하면서 늘 노래를 틀어놓는다. 같은 음악이 질릴 때쯤이면 팟캐스트를 듣기도 한다.

 

혼자 있으면 왠지 모르게 외롭고 고독해진다. 때문에 귀가 잠시도 쉬지 못하게 노래와 라디오, 영상 등에 의존하며 이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한다. 하지만 혼자인 고독한 순간에 느끼고 배우는 것들이 있다.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여러 생각들을 정리함과 동시에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유튜브나 음악 등의 도피가 아니라 적막으로부터 오는 사색이 필요하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순간을 잘 지낼 줄 알아야 보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안정한 감정의 지금 나는 ‘적막을 마주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상처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나는 말이 많은 학생이었다. 부모님께서 그만 떠들으라고 하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이 웃는 게 좋았고 그래서 더욱 발랄하게 지냈다. 하지만 지나치게 순진했는지 이 같은 행동들은 사람들이 나를 그저 가벼운 이로 보게 만들었다.

 

웃긴 친구, 무슨 말을 해도 늘 웃는 친구, 그래서 상처 되는 말을 해도 되는 사람. 나의 이미지는 그렇게 변모해 갔다. 어쭙잖게 착한 성격 탓에 얼굴 붉히기 싫어 상처받아도 저 늘 웃어 보였고 그러다 결국 화내는 법을 잊기까지 했다. 그렇게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말 수가 줄어들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겪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면 나는 그들을 웃기려 들었고 그렇게 다시 가벼운 사람이 되었고 홀로 상처받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거듭될수록 상처는 탄환처럼 크고 깊어졌다. 그리고 말도 꺼내보지 않은 채 상처 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인연을 끊었다.

 

말 한 번 해보지 않고 홀로 상처받고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미성숙한 행동이다. 하지만 상처 준 이와 상처에 대해 논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같이 있으면 편안한 최소한의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유지하고 살게 됐다. 굳이 나와 맞는 않는 상처 주는 사람까지 껴안으며 인간관계를 넓히기엔 그만한 그릇도, 여유도, 마음도 안 된다. 관계 망은 좁아지더라도 사람에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만의 도피성 선택지인 것이다.

 

 

 

연결과 정적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시공간을 초월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 마음만 있다면 24시간 내내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초 연결은 지나친 피로를 불러온다. 누군가와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연결이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꼭 누군가를 만나서 얘기를 할 필요도 없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니라면 외면하기보단 직면하는 편이 현명하다.

 

정적이 어색한 시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나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이 좋다. 오로지 내 마음의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여러 생각과 영감이 떠오른다. 때문에 밤 시간을 유독 좋아한다. 낮에는 필요한 연락 때문에 핸드폰을 맘대로 꺼놓기 어렵지만 밤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다. 세상과 나의 연결을 끊는 기분이며 철저히 나 혼자가 되는 기분이다. 그러면 외로움과 고독을 직면하고 오롯이 혼자임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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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혼자


 

사교적인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누구와도 잘 지내고 스몰토크도 잘할 줄 아는 사람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분위기를 이끌 줄 아는 사람들. 나도 그런 성격이고 싶었고 그러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 명, 네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게 될 때면 피로한 기분이 들었고 사소하게 상처받을 일이 더 생겼다. 그러면서 사람을 만날 때는 웬만하면 단둘이서만 만나는 경향이 생겼다. 상처받는 게 무서워 악착같이 도망 다니는 것이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당연하게도 사교적이고 유쾌한 사람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있으며 오히려 고독하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만나 상처받을 바에야 아무 소리 없이, 어떠한 연결도 없이 혼자 있는 편이 행복하고 안정적이다.

 

그럼에도 산다는 건 결국 먹고사는 문제이기에 앞으로도 나는 사교적인 척, 밝은 척, 이타적인 척 등등 여러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마스크처럼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가면을 바꿔 끼며 살아가야 한다. 사회 속에 구성된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잔혹하다. 가면을 벗고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은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오롯이 혼자가 될 때 찾아온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끊고 정적 속에서 가면을 내려놓기는 분명 어렵지만 이는 지나온 상처를 아물게 함과 동시에 한걸음 성장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성격이나 상처 즉, 자의로든 타의로든 마주하게 되는 고독은 분명 스스로를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는다. 사람과 세상이 무서워 혼자인 게 좋은 건 결코 결핍이나 장애가 아니다. 그저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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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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