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멸망으로 지속하기 - 소설 '리셋'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1.1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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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한결같이 물어본 질문이 있다. “만약 한국에서 인간 대상의 안락사가 합법화된다면, 넌 죽을 거야?” 밤새 외운 대사 한 줄을 충실히 반복하는 신인 배우마냥 묻는 말에는 참 다양한 답들이 돌아왔다. 고시생인 친구는 미래에 자신이 이루게 될 것들이 궁금하기에 그러지 않겠다 했고, 교사를 꿈꾸는 언니는 때가 되면 직접 죽음을 선택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고 말했으며,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지인은 어제 물어봤다면 그럴 거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나와의 만남이 즐거워 좀 더 살아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럼 조건을 하나 추가해 되물었다. “만약 사흘 뒤에 전지구적인 재앙이 닥친다면, 그래도 죽지 않겠어?” 미래에 대한 막연함을 기대감으로 누르고 있던 그들에게 미래 자체를 뺏어버리자, 대답은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펜데믹으로 엷게나마 재앙의 맛을 본 우리이지만 종말 앞에서 서툰 건 여전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에게 그 질문을 되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억하는 한 꽤 오래 전부터 재앙을 상상해왔다. 모든 게 파멸로 막을 내리는 서사에 끌렸고, 디스토피아물을 탐독했으며,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문명을 위해 끝없이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기를 반복하는 창조주의 이야기를 혼자 소설로 써내리기도 했다. 재앙을 앞둔 인물들의 다양한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재앙 자체가 주는 서사적 자극에 끌렸다고 고백한다. 이는 재앙이라고는 그 엇비슷한 것 한번 경험해본 적 없는 이의 오만이겠지만, 난 내가 싫고 세상이 싫을 때 어쩔 수 없이 인류 전체를 벌하는 재앙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재앙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는, 디스토피아의 유토피아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 끝이 일회용 우주선에서 내려온 거대 지렁이들의 패악질로 인한 것이라면, 지렁이들에 의해 먹히고 분해되는 인류 멸망이라면, 어딘가 터무니 없고 낭만도 없고 파멸의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얼굴도, 하여튼 여러모로 많은 것이 없는 경우라면 그다지 생각해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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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리셋>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거대 지렁이들에 의해 문명이 파괴되고, 인류 전체의 역사가 일명 ‘리셋’된 세상을 가정한다. 그리고 리셋 원년, 리셋 2년 후(A.R. 2년.), 리셋 74년후(A.R. 74년)를 사는 여성들의 일기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내 인류와 지구가 리셋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속가능성과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해 오히려 단절의 방식을 택한 이 독특한 작품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아래는 내 나름대로 이 매력적인 작품 <리셋>을 환경 담론 및 지속가능성과 관련해 몇 가지 키워드로 분석한 내용이다.

 

 


나의 재앙은 당신의 구원: ‘지렁이’


 

앞서 재앙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들을 풀어놨지만, 사실 이 소설은 거대 지렁이들에 의한 재앙이니 인류 멸망이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재앙으로서 구원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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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을 ‘극단적인 국외자’ 존재로 은유하고, 지구를 침략한 악한 타자로 설정하는 SF 작품들을 종종 본 적 있을 것이다. 인종, 성별, 종교 등을 뛰어 넘어 전세계 인류를 지구인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똘똘 뭉쳐 대항하도록하는 절대악으로 설정한 예시이다. 이는 그들이 인간만이 주인인 지구라는 집을 침략한다는 오만한 설정처럼도 보인다. <리셋>의 거대 지렁이들 역시 예고도 없이 UFO에 실려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무분별한 파괴와 살인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이 침략 외계인을 닮았다.

 

작품 속 앤의 가족을 통해 지렁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드러난다. 지렁이는 분변토를 통해 토양을 풍부히 하는, 지구에서 가장 이로운 생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렁이가 대지를 집 삼는 것이 아닌, 오히려 대지가 지렁이를 고향 삼아 지력을 유지해온 것으로 봐야 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영어 명칭이 ‘Earthworm’일까.) 그렇다면 이토록 선하고 묵묵한 일꾼인 ‘지렁이’가 멸망의 주체인 악한 존재로 그려진 점은 분명 신선하다. 작가는 왜 이러한 선택을 한 걸까.

 

사실 지렁이는 단 한 순간도 지구를 위하지 않은 적 없었다. <리셋> 속 거대 지렁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분변토를 만들어내는 지렁이의 행위에 어떤 자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을 지는 모르나, 만약 그러하다면 그건 인간이 아닌 지구를 위한 행위일 것이다. (어쩌다 농사라는 인간적 행위와 이익관계가 맞았을 뿐일 테다.) 지구적 입장에서 다른 종을 착취함으로써 스스로의 생존권을 고집해나가는 유일한 종은 인간뿐이고, 그렇다면 사라져야할 것은 인간, 너그럽게 범위를 좁히자면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리셋>의 거대 지렁이들의 문명 파괴는 그렇기에 다른 종들과 지구라는 행성 입장에서 하나의 ‘구원’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지렁이는 인간을 노리기 보다 플라스틱이나 철근을 마구 먹어치울 뿐인데, 수많은 사상자의 발생은 건물 등에 휩쓸려 부차적으로 일어난 비극 정도로 묘사된다. 지렁이들은 토양을 해치는 건물과 기물들을 충실히 제거하고 분변토로 덮어 비옥한 땅을 위해 봉사한다. 지렁이다운 묵묵함으로, 한결같이. 오직 지구의 주인인 지구를 위해서.

 

지구 침략 모티프의 주체를 불쾌한 골짜기를 경험하게 하는 인간형 외계인에서 지렁이로 바꿨을 뿐인데, <리셋>은 구원서사가 된다. 이 작품은 분명 일기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독자로 하여금 지렁이를 비롯한 동식물 주체의 시선을 취하게 한다는 점에서, 환경 담론을 말하기 위한 첫 단계, 즉 ‘인간 주체로서의 시선 버리기’ 과정을 <리셋>은 놓치지 않는다.

 

 

 

리셋 전후의 인간


 

이제 <리셋> 속 인물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인상적인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두가 재앙에 초연하다는 점이다. 리셋 원년, 남쪽으로 가는 여성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경주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다. 왕릉 앞 벤치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책을 읽고 싶다는 소박한 지향으로 남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상마저 제대로 갖출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짓을 하기 전에 지렁이들이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이다.(p.45)’라고 독백하며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과 ‘기이한 종류의 경배감(p.45)’을 느끼기까지 한다.

 

지구의 모든 조각을 파괴하면서까지 일궈낸 문명이라면 적어도 인간에게만큼은 이롭고 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인터넷은 거의 모든 날 끔찍했(p.47)’을 뿐이며, 피라미드 아래에 고인 인간을 끝없이 착취함은 물론, 이기적일 만큼 거대한 왕릉 앞에서 책 하나 읽을 여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 문명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재앙은 해가 뜨고 지듯 당연한 바였고, 어찌 힘써볼 수 없는 거대한 돌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풍마저 집어 삼킬 거대한 멸망의 등장은, 어쩌면 달갑기까지 한 것으로 인식된다.

 

동쪽으로 가는 여성, ‘앤(Ann)’은 평생 지렁이를 연구한 엄마들에 의해 환형동물이란 뜻의 'Annelid'에서 그 이름을 취했다. 탄생부터 지렁이와 존재가 맞닿은 인물이다. 그는 리셋 2년 후 더블데이 팀의 막내 연구원으로, 거대 지렁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렁이에 대한 애정과 학자적 열망에 의한 것이지, 그 존재의 악함을 익히 알고 앞으로 또 다시 다가올 재앙에 대비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심지어 거대 지렁이에 의해 가족이 모두 희생되었는데도 ‘지렁이들이 일부러 죽인 건 아니다. 지나치게 가까이 간 건 엄마들이었다.(p.63)’라고 말할 정도로 재앙에 초연한 인물이다. 그러다 앤은 사실 거대 지렁이를 보낸 것은 타임머신을 개발한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는 ‘인간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아닌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해 자신이 속한 인류의 과거를 기꺼이 단절시키는 독특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리셋 47년 후를 사는 ‘아미’와 인류는 리셋 전의 인류에 대한 은은한 혐오감을 안고 살아간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라고 언급했는데, 이를 서사적으로 구현한 셈이다.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지렁이와 리셋의 역사에 대해 아미는 지렁이의 침략을 두려워하며 살기 보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기로 마음먹(p.78)’고 묵묵함을 유지한다. 농사를 지으며 지구를 장식한 수많은 동식물을 먼 거리에서 관찰하고 공생하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이다. 더 이상의 의지와 욕망을 키워가는 것은 리셋 전 인류의 과오를 반복하는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리셋 이전 인물들의 초연함이 이들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분리해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북쪽으로 가는 여성은 공적인 자리를 위해 굽 5cm의 펌프스(구두의 일종)를 신었던 탓에 국제종자저장고로 가는 지난한 길에 방해를 받는다. 앤 역시 ‘어린 여자애’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롭지 못해 뛰어난 지력과 판단력에도 무시 당하기 일쑤이다. 그는 기어이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인류가 망한 건 아닌가(p.60)’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내뱉는다.

 

*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에코 페미니즘에 빗대어 설명해보면, 언제나 교묘히 착취 당하는 편에 놓여있던 여성들에게 지렁이로 인한 사회 기반과 문명의 파괴는 세계관을 뒤집을 기회로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리셋 47년 후를 사는 ‘아미’의 일기를 살펴보면, 남녀 구분에 관한 묘사가 흐릿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정체성도 특기하지 않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멸망이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에코토피아’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아닐까.

 

 

 

단절로 지속하기


 

소설 <리셋>은 어쩌면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 자체를 무력화한다. ‘지속가능성’이란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어떻게 온건하게나마 발전을 이뤄갈 것인지,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구가 주는 자원이 부재해서는 곤란하니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오수(汚水)가 한 번 올라와 넘치고 나서야 깨끗한 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리셋>은 가장 선한 지렁이에게 지구를 위한 가장 선한 파괴 행위를 맡긴다. 앤은 ‘서부로 이주했던 옛날 개척자들과 자신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게 공교롭다(p.65)’고 언급하는데, 서부 개척 시대 ‘동->서’의 방향성은 그대로 지구 착취의 긴 흔적을 남겼고, 이 방향을 거스르는 것은 그를 ‘리셋’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리셋의 결과는 어느 정도 성공이다. 물 반 고기 반인 바다를 보고 물고기가 이렇게 많아도 되겠냐는 ‘아미’의 물음에 “뭐 이젠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죠.”하는 건조한 대답이 돌아온다. 환경 담론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두번째이자 최종적인 태도가 바로 이것이라 느낀다. 타자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놔둘 것. 무심하고 건조한 공생관계를 배울 것. 리셋은 분명 필수불가결한 멸망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투기로 폭탄이라도 떨어트려서 문명을 죄다 파괴해야 한다는, 그런 막연한 비관이 전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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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에서 인간의 이로운 속성으로 언급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연대의 가능성’이다. ‘세상이 끝나가도 우리는 친밀감을 소중히 한다(p.63)’는 앤의 묘사나 종자 연구원의 배우자와의 마지막 통화 내용,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단번에 도와주러 간다’는 묘사와 ‘리셋 이전의 괜찮은 부분은 지속되고 있다’는 명시(p.91)이 그러하다. 재앙 속에 타인을 착취하기 보다는 연대하려는 시도들로 소설이 짜여있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오늘날 문학만이, 또 SF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수불가결하다 여겨왔던 인간의 욕망에 멸망을 고해야 한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인문학이기에 제시할 수 있는 답인 동시에, 모든 관련 제도나 기술의 근간을 이뤄야만 하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자칫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는 <리셋>의 함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한 깨달음을 준다.

 

 

 

문학도 ‘리셋’, 다시 거대 담론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SF라는 장르는 한국 문학계에서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특히 젊은 여성층에 의해 SF 소설들이 크게 주목 받는 최근 현상은 가히 이례적이다. 지금껏 논한 <리셋>도 마찬가지지만, SF는 광활한 우주적 위치에 인간을 두고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이로운 장르성을 지닌다. 자연스럽게 거대 담론을 말하기에도 용이한 것이다.

 

90년대 이후 문학은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는 경향성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SF문학의 활발한 대두는 ‘문학 역시 다시 전 지구 차원의, 집단과 거대담론의 주제로 회귀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이에 대해 <리셋>을 예시로 대답해보자면, 이 작품의 구조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셋>은 여러 여성의 일기만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일기란 가장 사적이고 솔직한 글쓰기인 만큼 이 작품은 각 여성들의 역사와 심리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각자의 직업과 나이대, 사회적 위치, 성장 배경과 긴밀히 관련된 서사를 나열하면서도 ‘재앙을 맞은 지구인’으로서의 특징을 공유해 같은 담론을 이끌어간다. 개인의 미시 세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지속하면서 지구의 작은 구성체인 ‘나’를 타자적 위치에 놓아 거대 담론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 현대 문학의 팬인 나로서는 최근 개인적인 발화가 거대 담론으로 확장되는 형태의 서사가 많다고 느낀다. 이는 독자로서의 나를 자주 만족시키는 부분이다. 해서 나는 <리셋>이 미시 세계를 거울로 거시 세계를, 반대로 거시 세계라는 프리즘으로부터 뻗어나온 빛무리로 미시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내 짧은 문학적 소견을 드러내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진술일 수 있지만, 나는 주체로서의 ‘나’의 모습을 통해 미시 세계를, 객체로서의 ‘나’를 통해 거시적 세계를 교차시키는 자유로운 방식의 문학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사실 문학도 ‘리셋’을 맞아 거대 담론 주제로 반드시 ‘회귀’해야 하는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발화할 필요성은 있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최근 한국 문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은 이에 아주 능하다고 느낀다. 개인을 통해 전체를 발화하는 동시에, 보편화 할 수 없는 개인의 특수성 역시 놓치지 않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으며, <리셋> 역시 그 범주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낳은 재앙 앞에 선 절대악’인 동시에 각자만의 이유로 때때로 낭만적인 ‘리셋’을 꿈꾸는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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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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