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금 특별한 반복 [미술/전시]

행위의 무한반복성
글 입력 2021.11.2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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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이어리를 펼쳐 오늘 할 일과 느끼고 싶은 감정을 적는다.

 

종이와 펜이 주는 물성은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원하는 감정을 적는 일은 늘 설레는 작업이다. 반드시 해야 할 업무적인 일들은 크든 작든 부담감을 준다. 하지만 성취감, 다정함 등의 감정을 적는 일은 오롯이 ‘나’에게 더 집중하게 하는 괜찮은 방법이다.

 

하루 동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하루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습관이지만 오늘을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고 성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마무리됐는지 체크하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반복적인 행위지만 늘 새롭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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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적이지만 ‘같음’은 없는 작품이 있다. 김종영의 ‘작품 70-1’이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전에서 눈길을 끌었다. 색채나 작품이 갖는 역동성에 항상 끌렸었는데 무심한듯 고요한 나무조각 앞에서 멈춰 서다니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한쪽 면은 둥글게 튀어나오고 반대편은 오목하게 들어간 모습이 얼핏 기왓장처럼 보였다. 아니면 전통적인 건축자재인 기와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기왓장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 점이 매력적이다. 익숙한 형태를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보면 새롭다는 말이다.

 

‘작품 70-1’의 캡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직선인 부분이 작품 어느 곳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느낌이 드는 것은 끝을 사용하는 힘의 정도와 시간이 그대로 드러나게 잘게 다듬어 끌로 마감한 노동의 결과가 작품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형태의 작품이 결코 단순하지 않게 느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작가의 시간과 노동이 가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는 작가의 예술관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손끝에서 근육으로 옮겨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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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에서 열린 박서보 개인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묘법 연작 중 2000년대 이후 색채 묘법으로 알려진 근작 16점이 전시돼 있었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에 불린 한지를 세 겹으로 붙인 후 굵은 연필로 선을 그었다. 그렇게 하면 아직 마르지 않은 한지는 좌우로 밀려 고랑 형태가 만들어진다. 물기가 마르면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덧입히는데, 이는 작가가 경험한 자연 경관을 담아낸다.

 

작품을 보는 거리에 따라 화면의 전반적인 색감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이것이 작가가 생각한 자연적인 요소다. 벚꽃의 꽃잎은 애초에 흰색이지만 중앙의 붉은 수술대 때문에 연분홍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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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필로 그어내는 행위의 반복은 축적된 시간과 작가의 철학을 보여준다.

 

박서보는 단색화를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 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생성된 흔적을 정신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렸다. 즉, 관람객은 작품의 메시지를 읽어내거나 작가의 유도에 따른 경험을 할 필요 없이 그저 화면을 감상하면 된다. 애초에 목적성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한 목적이 없다 할 지라도 작품에 담긴 무한 반복성은 그 자체로 울림이 있다. 일정한 간격의 고랑은 안정감을 선사한다. 거기에 활력 넘치는 색채까지 더해지니 캔버스 화면을 그대로 패턴으로 만들어 파자마 세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전시장을 나와 밥을 먹으며 그제서야 전시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작가는 “작품을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흡인하는 ‘흡인지’라 일컫는다”고 했다. 내가 가진 감정과 작가의 생각이 통했다고 느낄 때 갖는 짜릿함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


반복적인 행위는 힘이 있다. 그것이 단순한 무한반복과 무목적성일지라도 그 결실은 시간과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 단순한 루틴도 처음에는 큰 의미 없이 시작했다. 다만 조금 부지런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생활이 되고 삶이 되고 역사가 됐다. 조금 더 정돈된 하루와 스스로를 살펴보는 시간들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한 길잡이가 돼주었다. 김종영과 박서보의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습관이다.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게 되돌아 보게 만드는 예술의 힘을 느껴본다.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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