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머리 속에 독창성이 존재할까? 내가 부정적이라 머리카락이 도망친 걸까? ······ 치과에서 또 전화 왔다. 안 간 지 한참 됐어. 미루는 습관을 버리면 행복할 텐데 ······ 엉덩이가 작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셔츠로 덮을 필요도 없는데 ······ 머리를 좀 잘라야겠다. 머리칼이 많은 척 남들을 속이면 안 돼. 비참하잖아. 그냥 자신감을 갖자 ····· 살아 있어서 죄송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 ······ 그런데 못생긴 건? 그건 치료도 안 될 텐데."
영화는 한 남자의 중얼거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식 속을 유영하는 듯한 맥락 없는 혼잣말이 끝나면 불쑥,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촬영 현장이 나타난다. 거기엔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이 있다.
1. 찰리 카우프만이 들어선 샛길
![[포맷변환][크기변환]8702C878-DAE9-4F68-8726-E09EC5B62F0C.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1/20211120095803_vzvoptlq.jpg)
![[포맷변환][크기변환]9F4B0B64-195B-40CB-AC42-476D54DF23F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1/20211120095806_uppvbrqi.jpg)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극 중의 찰리 카우프만은 스태프에게 "시야 가리지 말고 좀 비켜요."라는 말을 듣는 변변찮은 존재이다. 그는 타인과의 소통이 두려운 소심한 성격으로 대화 중에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기 일쑤다. 스스로 "뚱뚱하고 비참"하다고 여기며 자기 비하를 일삼는 찰리 주위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는 끝없이 생각하지만 정작 행동하진 못한다.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이것이 찰리에 대한 최적의 설명이다. 데이트 중, 속으로는 "그녀를 웃게 해야지. 재밌는 말을 해"라고 되뇌면서도 실제로는 "파티가 싫어. 여기에 왜 온 거야?"라며 불만을 늘어놓는다. 애인에게 키스해야겠다는 강렬한 생각과 달리 그의 손은 즉시 차에 시동을 걸며 그녀를 떠나고, 수잔 올린을 만나자고 마음먹지만 막상 그녀와 마주치자 재빨리 도망친다.
영화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강박에 시달리는 찰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허구와 실재를 영리하게 뒤섞는다. 글쓰기와 씨름하는 찰리와 그의 쌍둥이 동생 도널드 모두 <어댑테이션>의 실제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을 떠올리게 한다. 어디까지 자신을 투영해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망상과 현실을 버무리는 솜씨 하나만은 그의 DNA가 분명하다.
2. 어댑테이션, 각색과 적응
메타픽션은 픽션과 현실과의 경계 혹은 관계를 이용함으로써 허구적 구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패러디의 한 형태이다. 가장 확실한 예로는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소설이 있으며 이 경우 주인공은 창작자와 이름을 공유한다.
이야기(소설 <난초 도둑>)에 대한 이야기(영화 <난초 도둑>)에 대한 이야기(영화 <어댑테이션>)라는 점과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의 분신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메타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허구의 허구의 허구의 노정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어느 날 찰리는 논픽션 소설 <난초 도둑>의 각색 의뢰를 받게 된다. 창작의 늪에 빠진 찰리는 너절한 상념을 이어가며 그 속으로 도피한다. 찰리의 상상과 일상은 어느 순간부터 <난초 도둑> 속 세계와 혼합되고···.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전개로 질주한다.
영화는 찰리의 의식 깊숙한 곳을 탐험하며 백지 앞에 선 그의 처절한 몸부림을 하나의 서사로 펼쳐 보인다.
![[포맷변환][크기변환]8C689DDD-884F-4F26-AD65-E21EB968535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1/20211120100040_rsfefhec.jpg)
제목처럼 '각색'과 '적응'은 이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이다.
찰리는 <난초 도둑>을 영화화하는 과정을 통해 할리우드 문법에 적응해간다. 찰리는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동생 도널드를 무시하지만 "올해 최고의 각본"이라는 프로듀서의 평을 전해 들은 후로는 열등감을 느끼며 도널드가 추천한 스토리텔링 강의까지 따라 듣는다.
수잔 올린의 말에 따르면 적응은 "도망치는 것"이며 그렇기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초조함에 잠식된 찰리에게 부끄러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위대한 도널드라면 엔딩을 어떻게 낼까?"라고 동생의 비위를 맞추는 찰리. 도널드에 대한 그의 의존은 점차 심해진다.
찰리의 시나리오는 도널드가 개입하면서부터 구색을 갖추어 간다. 사건과 갈등, 욕망이 복잡하게 얽히며 그야말로 '시네마틱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작업은 시나리오 일타 강사 로버트 맥키의 세미나를 통해 더욱 발전되고, 어느 시점부터는 쓰는 이들을 앞질러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3. 엔딩이 영화를 만든다
영화 초반, <난초 도둑>에 관한 미팅에서 찰리는 "할리우드 영화 공식을 따르긴 싫어요. 난초를 강탈하는 강도 영화로 만들거나 난초를 양귀비로 바꿔서 마약 영화로 만드는 것처럼요."라며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
<난초 도둑>의 작가 수잔 올린과 책 속 주인공인 존 라로쉬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어떠냐는 제안에도 "영화에 섹스와 총격 장면, 추격전을 욱여넣긴 싫어요. 캐릭터들이 인생의 교훈을 얻고 성장하고 화해하거나 장애물을 극복하고 끝내 성공하는 것도요."라며 자신은 이제까지 없었던 '꽃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이라 강조한다.
그러나 그럴듯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찰리는 결국 할리우드의 원칙에 항복하고 맥키의 조언 ("엔딩이 영화를 만듭니다. 마지막을 잘 쓰면 히트치죠. 결점과 문제가 있어도 끝만 잘 쓰면 돼요.")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후반부는 찰리가 싫다고 한 모든 요소(마약과 섹스, 총격전과 쌍둥이들의 화해까지···.)가 난무한다.
찰리가 자신의 신념을 번복하고 도널드와 손을 잡은 시점에야 비로소 본론을 드러냈던 <어댑테이션>. 찰리의 가장 첫 소신을 뒤집는 것으로 두 이야기(<난초 도둑>과 <어댑테이션>)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절묘한 엔딩이 아닐 수 없다.
![[포맷변환][크기변환]84FC41CE-BF4D-42F7-8BA5-9D00AE0D0DE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111/20211120100019_ufpmwqac.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