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휘발된 상처, 그 위에 피어난 유머 [영화]

영화 <아네트>로 본 스탠드업 코미디의 자기파괴적 속성
글 입력 2021.11.0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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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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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아네트>를 보러 갈 이유는 충분했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나쁜 피>는 지난 1년간 내가 가장 애정하는 영화로 꼽을 만큼 좋아했다. <나쁜 피>가 그러했듯 <아네트> 또한 나를 사유하게 하고, 뭔가 쓰게 했다. 역시, 이래서 레오 카락스를 좋아했지, 생각한 동시에 역시나 그는 새로운 시도를 했구나,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나는 그의 작품의 난해함을 사랑했는데, <아네트>의 서사는 굉장히 단순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와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LA에서 결혼한다.

 

둘 사이에서 딸 '아네트'가 태어난다.

 

안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헨리의 코미디에 가해지는 혹평은 극에 달한다. 이후 아네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헨리는 아네트를 마리오네트처럼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단순한 서사가 연극과 뮤지컬, 영화를 오가는 역동적인 무대에서 펼쳐진다.

 

  


'유머'라는 설탕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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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괴로울 때 웃는다. 특히 주삿바늘이 내 팔에 꽂힐 때 발작적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울음만큼이나 웃음도 도저히 통제할 수 없다. 간호사는 나를 낯설게 쳐다본 뒤 이내 고개를 돌리지만, 주삿바늘이 팔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 자지러지게 웃는 나를 보며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난처해한다. 영화 <조커> 속 아서의 웃음이 웃어야 하는 상황과 웃지 말아야 하는 상황의 경계를 흩트려 놓았듯 나의 발작적 웃음도 마찬가지다.

  

영화 <아네트>를 관람한 뒤,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헨리(아담 드라이버)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안(마리옹 꼬띠아르)의 발을 간지럽히자 안이 몸을 비틀며 웃는 장면이었다. 안의 웃는 얼굴은 기겁하며 울고 있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발을 간지럽힌다’는 것은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동시에 고통을 주는 가학적 행위일 수 있다.

 

한편 안이 출산을 하는 장면에서도 “웃어라”는 요구는 지속된다. 분만실의 의사와 간호사는 한목소리로 안에게 웃음을 강요한다. 웃음이라는 달콤한 설탕 가루로 포장된  고통은 잠깐은 그 모습을 감출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결코 웃음에 의해 휘발될 수 없다. 출산 중 안의 고통이 웃음에 가려질 수 없듯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헨리가 무대에서 사람들을 웃기는 이유는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서는 동시에 무대 위에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소비한다.

 

자기구원적 속성과 자기 파괴적 속성이 동시에 담겨 있는 그의 유머, 그 달콤한 설탕 가루 속에는 무엇이 갇혀 있었던 것일까.

 


 

스탠드업 코미디 발언권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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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에서 관객과 코미디언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이다. 다수의 관객을 상대로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광대가 되어,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재미있게 웃겨야 한다.

 

관객들을 웃겨야 한다는 점은 관객과 코미디언 사이에 상하 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객은 헨리의 무대를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다. 헨리가 무대에 오르기 전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헨리가 자신을 서커스 무대에서 재롱을 부리는 원숭이로 생각함을 상징한다. 오페라 무대에 오르는 소프라노 ‘안’은 고상한 예술가로 격상되는 반면,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직업은 헨리와 관객들에게 격하된다는 점 또한 이에 상응한다.

  

한편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유머를 무기로 사회의 금기를 넘나들 수 있는 특별발언권을 얻기도 한다.

 

영국의 셰필드 할렘 대학의 연구교수 ‘사라 밀스’는 코미디언이 청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아웃사이더로 만들어 관객을 웃긴다고 주장한다. 코미디언은 관객을 하나의 단합된 집단으로 간주해 자신은 그곳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이렇게 타자가 된 코미디언이 발화하는, 비정상적이거나 예측 밖의 생각들에 관객은 충격을 동반한 웃음과 함께 코미디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코미디언은 이러한 타자화 전략으로 관객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유머를 말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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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코미디언에게 공연을 통해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일은 직업적, 사회적 책무에 불과한지 모른다. 그렇다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얻은 특별발언권은 허구적인 특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해나 개즈비의 <나의 이야기(2018)>라는 제목의 코미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코미디의 고정된 발화 형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특정한 문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정치적 올바름'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스탠드업 코미디는 비주류 사회의 입장에서 주류 사회를 향한 비판을 소재로 하므로 정치적 올바름 문제에 민감하다. 이를 지키지 못한 코미디언에게는 즉각적으로 비난과 논란이 가해진다. 코미디언들이 획득한 것처럼 보였던 특별발언권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책무로 그 권한을 빼앗긴다.

 

이러한 검열 과정을 거치며 스탠드업 코미디의 농담은 발화자 자신의 고통과 상처에 뿌리를 둔 것만을 용인하게 된다.

 

그리고 스탠드업 코미디 문법에 따라 발화자의 고통과 상처는 펀치 라인을 위한 긴장 조성의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네, 긴장감을 조성하는 게 제 일이에요.

긴장감을 조성했다가 여러분들을 웃기는 거죠.

그러면 다들 안도하실 거예요. ‘아유, 긴장했었네’ 하면서요. 

 

[……] 하지만 이젠 지쳤어요.

긴장은 저를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코미디를 중단했죠.  

 

-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2018)

 

 

해나 개즈비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코미디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해나 개즈비가 스탠드업 코미디로서의 자신의 삶을 멈추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코미디언과 관객 사이에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장치들이 있고, 그 장치들을 드러내보이겠다는 의지이다.

 

 

 

자기파괴적, 자기방어적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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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는 죽지 않고 진실을 말할 유일한 방법이야 

 

- 영화 <아네트>, 헨리

 


이제 다시, 헨리가 무대에서 사람들을 웃기는 이유는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 대목으로 돌아오자. 이 대목은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책무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란 직업에 임하지만, 이는 자신의 고통을 무대 위에서 소비하는 행위로 자기 파괴적 속성이 있다. 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헨리는 역설적으로 유머라는 방어 수단을 사용한다. “코미디는 죽지 않고 진실을 말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헨리의 대사가 시사하는 바이다.

 

헨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 복싱 선수의 워밍업 동작처럼 허공에 원, 투, 어퍼컷을 날리고, 복싱 가운처럼 보이는 복장을 걸치고 무대에 선다. 그는 유머라는 갑옷을 입고, 맨몸으로 무대에 서서 자기비하와 멸시의 과정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겪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헨리는 무대 위에서 관객에 의해, 사회적 책무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고자 복싱 선수의 공격성을 체득해야 했다.

 

그 공격성은 무대에서 관객의 웃음과 몸짓, 손짓에 따라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지 않고, 다수, 즉 지배적 위치에 있는 무대 아래 관객을 또렷이 응시하겠다는 의지적 성격을 지닌다.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를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로.

 

 

 

헨리가 안에게 부여한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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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습득한 헨리의 폭력성은 안에게 또 다른 방향의 폭력으로 비틀려 작동한다.

 

안의 발을 끝까지 간지럽히고 있는 헨리의 모습은 기묘하다. 안은 분명 웃고 있지만, 헨리로부터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아네트>에서 안과 헨리의 관계성에는 공백이 많다. 따라서 안과 헨리의 관계에 대한 나의 해석이 다소 과장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백이 많기에 상상과 해석의 폭넓은 수용 또한 가능할 거라 기대하며 조금 더 이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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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타자들’은 ‘안’을 만나기 전까지 관객들이었다. 하지만 유머라는 껍질로 쌓인 헨리의 정체성은 유머처럼 무대 위에서 휘발될 뿐이다.

 

관객은 헨리에게 온전히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관객과 헨리 사이에서 회복하지 못한 발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헨리는 안과의 관계에서 회복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가 휘발되는 대신 온전한 이야기로 안에게 전달되길 바란 것이다.

 

안에게서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헨리의 비틀린 욕망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안은 막대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관객이 헨리에게 해주지 못한 일을 수행할 임무. 헨리에게 그가 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할.

 

하지만 타자로부터 얻는 자신에 대한 정체감은 땅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약한 바람에도 쓰러질 만큼 불완전하고, 불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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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쳐다봐...

 

- 영화 <아네트>, 헨리

 

 

헨리는 안이 죽기 전 이렇게 말한다.

 

“그만 쳐다봐”

  

헨리는 안의 눈빛에서 관객들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일까. 헨리는 안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신한다.

 

임무의 본질적 실패를 떠안은 안은 그렇게 결국 죽고 만다.

 

 


아네트가 물려받은 안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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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네트> 속에서 ‘안’이 실패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아네트다. 아네트는 엄마인 ‘안’의 재능을 물려받아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아네트의 목소리와 노래에 열광한다.

 

헨리는 아네트가 비로소 자신에게 자신이 원한 정체성을 부여할 인물임을 직감한다. 그때부터 헨리는 아네트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헨리의 위치는 아네트 덕에 전복된다. 무대 위에서 꼭두각시였던 헨리는 이제 조종자라는 지배적 위치에 선다. ‘아네트’는 ‘안’의 딸이기 때문에 ‘안’으로부터 시작된 헨리의 오랜 욕구를 일부 충족시켜주는 존재다. 이렇게 아네트는 철저히 헨리의 꼭두각시가 된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헨리가 그러했듯.

 

‘아네트’는 헨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바라봐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안'도, 관객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아네트는 한다.

 

하지만 다수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아네트가 “아빠는 사람을 죽여요” 말하는 순간, 헨리의 허구적 성취는 너무 쉽게 깨어져 버린다. 헨리의 유머가 무대에서 흩어져 버릴 때처럼 허망하기 그지없게 휘발될 뿐이다.

 

 

 

<아네트>가 이루는 거대한 유머의 세계


 

 

잊지 마세요. 제가 이야기할 건 어디까지나 그냥 농담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기 마련이고, 인생이란 것엔 속편이 없어요.

 

- 리키 저베이스, 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2020)

 


영화 <아네트>는 어쩐지 거대한 농담으로 읽힌다. 급격하게 전복되는 사건과 진짜 인간 대신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표현되는 ‘아네트’의 모습은 허구적 영상 예술의 특성을 강조하는 연출 방식이다.

 

레오 카락스는 해나 개즈비가 스탠드업 코미디의 고정된 발화 방식이 있음을 지적했듯, 영화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전 연출작들과 같은 모호한 서사 구성을 포기하고, 단순한 서사를 선택하여 연극과 뮤지컬, 무대와 관객석을 넘나드며 독창적 연출방식을 강조한 이유는 영화 연출의 고정적 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혹, 이 거대한 유머의 세계를 통해 발화자로서의 영화 감독 레오 카락스가 청자인 관객 혹은 자신의 딸과 온전한 관계 맺기를 시도한 것이라면 레오 카락스의 목표는 영화 <아네트>를 통해 성취되었다.

 

 

[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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