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대면 시대의 여행 [여행]

글 입력 2021.11.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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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여행’이라는 단어에 묘한 설렘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 자체로도 좋고, 가기 전까지의 떨림도, 다녀와서 물건이나 사진을 정리할 때의 따뜻함도 좋다. 지난 2년간 어쩔 수 없이 잊고 살았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집과 가까운 강원도는 가족과 함께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전부 당일치기였고, 우리가 한 일은 바닷가를 거닐다가 회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바다는 늘 좋았지만, 이 정도로는 내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랜선 여행’을 알게 되었다. ‘랜선 투어’라는 카테고리 아래,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홍콩 등 다양한 나라의 수많은 도시가 있었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였는데, 가격대는 아무리 비싸도 3만 원을 넘지 않았다. 커피 몇 잔, 외식 몇 번 참으면 그만인 돈으로 해외에서의 2시간을 살 수 있다니. 궁금했다.


예약은 금방 끝났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는 실제 해외여행과 비교하면 아주 편했다. 그저 날짜, 장소, 인원을 입력한 뒤 결제만 하면 되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파리 몽마르뜨 언덕 투어’였다. 파리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맞는 투어가 이것뿐이었다.


랜선 투어라니, 이게 여행 다니는 유튜브 브이로그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순전히 궁금함 때문에 돈을 쓸모없는 데에 낭비한 것은 아닐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별 다섯 개짜리 리뷰를 읽으며 조금이나마 기대를 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는 설렘이 없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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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당일 밤 9시, 나는 잠옷 차림으로 방에 누워 스트리밍 링크를 열었다. 어둑한 한국과 달리 환한 대낮의 파리가 내 휴대폰 화면에 그대로 나타났다. 분명 놀라운 것 없는 길거리 풍경인데, 그것을 위해 돈을 지불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행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조금씩 가슴이 설렜다. 차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거리로 나와 있는 테이블까지 파리의 공기가 화면과 이어폰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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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6년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물랭 드 라 갈래트’와 ‘사크레쾨르 성당’이다. ‘물랭 드 라 갈래트’는 당대 젊은이들이 모여 무도회를 즐겼던 곳으로, 르누아르 작품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알고 보니 몽마르뜨 언덕에는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영업하는 가게들이 매우 많았다.


‘사크레쾨르 성당’은 투어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로, 몽마르뜨 언덕 위에 있어 파리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날이 맑아서 운 좋게 에펠탑도 볼 수 있었는데, 큼지막한 사진으로만 봤던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희미한 배경이 되어있는 것이 신기했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여행이 끝나고, 나는 조금 놀랐다. 투어가 예상보다 훨씬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파리를 가보고 싶은 생각도, 가본 적도 없었지만 당일치기 여행보다 재미있었다. 그것만으로 꽤 큰 가산점이 붙었다. 여행 앞뒤의 귀찮은 과정은 전부 생략하고, 짧게나마 여행의 정수만을 맛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장점이었다.


‘랜선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발견하고 난 뒤, 여행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다. 여행이란 자고로 목적을 가지고 거주지를 떠나 다른 곳에 머무르는 것 아닌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떠난다’는 여행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조차 만족하지 못하는 이 활동이, 어째서 재미있었을까?


여행의 쾌감은 그 목적이 뭐든 간에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는 데에서 온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새로운 장소라면 느낌이 다르고, 가는 길이 힘들어도 하나의 추억이자 교훈으로 남겨둘 수 있다. 물론 모든 새로운 경험을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불만족스러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지의 경험과 그 쾌감을 기대하며 다시금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하는 것이고, 실체 없는 경험을 소유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럼 ‘랜선 여행’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랜선 여행’이라는 방식 자체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험, 즉 ‘여행’이다. ‘랜선 여행’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가이드와 함께 파리의 길거리를 돌아다녀 보는 ‘체험’ 자체가 바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여행업계도 활기를 되찾는 추세다. 따라서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에도 ‘랜선 투어’가 지금과 같은 상품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실제 여행과 비교해 보면 분명한 강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 여행에 비해 훨씬 간편하고, 들이는 노력이나 비용에 비해 꽤 만족할만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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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내내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흐가 자주 갔다는 가게, 피카소가 사용했다는 아틀리에 등이 쉴 새 없이 눈앞에 쏟아졌지만, 그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들이었다.

 

길을 걷는 저 사람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 내가 그 사람들 틈에 섞여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이 정말 여행을 다니는 것 같았다. VR, AR 기술을 이용한다면 더 실감나는 '랜선 여행'을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멀게만 보였지만, '랜선 여행'을 한 번 경험하고 나니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면과 비대면의 경계는 점차 흐려질 것이고, 우리는 코로나가 완전히 끝난 후에도 많은 일을 화상으로 하게 될 것이다. ‘랜선 투어’가 여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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