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이라는 변명 속의 폭력 - 로테/운수 [공연]

글 입력 2021.11.0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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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고민은 이렇다. 공연이나 도서 등을 볼 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다. 예전에 좋아했던 작품, 혹은 명작이라고 알려져 잔뜩 기대를 품고 본 작품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작품일수록 실망감도 크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은 주로 작품 내 여성 캐릭터에 대한 생각에서 온다.


많은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스토리의 중요한 흐름에서 배제되거나, 전형적인 이미지와 서사만을 부여받는 일이 다반사다. 또는, 자극적인 전개와 표현을 위한 불필요한 폭력 묘사도 빈번히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들은 모두 제각각의 문제를 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폭력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방식이다.


 

 

‘사랑’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이야기



연극 <로테/운수>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이다. ‘사랑에서 살아남았다.’ 미묘한 문장이지만 단번에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비겁한 변명 뒤에서 일어나는 스토킹 범죄나 데이트폭력, 또는 전 애인에게 폭력이나 살해를 당한 여성들에 관한 기사가 거의 매일같이 보도되는 것을 일상적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들은 비단 개인에게 일어나는 비극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사회에서는 해당 범죄들을 상당히 가볍게 바라보며, 이는 잘못된 인식들이 뿌리 깊게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나 문학 작품 등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로맨스의 일부로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극 <로테/운수>에서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로테와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아내가 겪은 일을 현대적 배경에서 재구성한다. 그들은 이 연극에서 ‘김로테’, ‘이운수’ 라는 인물로 등장하며, 각각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다.


유부녀를 '짝사랑'하다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택한 청년 베르테르. 그리고 아내에게 일상적으로 욕설과 폭력을 행사했지만, 아내를 '사랑'해서 사온 설렁탕을 먹지 못하고 죽은 그녀를 안고 오열하는 김첨지.


실제로 베르테르의 집착은 로맨틱하고 순정적인 이야기로 그려지고, 김첨지는 츤데레 남자 캐릭터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묘사된 기존 작을, 연극 <로테/운수>에서는 여성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재해석 한다.


 

 

나와 멀지 않은 현실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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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운수>는 여성 인물들이 입은 피해 자체나, 가해 인물의 행동에 대한 비판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연극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회에서 스토킹이나 가정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인식이다.


'잘나가던 여교수를 사랑한 제자'라는 기사 제목.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3일 내내 집 앞에 찾아와 장미꽃을 두고 가도 그저 해프닝으로 여기는 로테의 주변인들. 그리고 가정폭력의 피해자 운수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쏟아진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요?", "폭력을 당했음에도 왜 이혼하지 않았나요?"


연극 시작 전 스토킹과 가정폭력에 관한 내용이 있음을 사전 고지받았고, 나는 해당 범죄에 대한 트라우마가 전혀 없음에도 연극을 보는 동안 숨이 턱턱 막혔다. 현실과 무섭도록 똑같은, 사회의 익숙한 반응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길 혼자 다니지 말라거나 사람 조심하라는 둥 일반적인 걱정의 말들이 떠올랐다.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되려 나의 부주의함에 대한 지적을 받지는 않을까.


이처럼 나는 로테와 운수의 이야기를 먼발치서 바라보며 '안타깝고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와 전혀 멀리 있지 않은 이야기인 걸 깨닫게 되었다.


*


로테와 운수는 폭력에서 벗어나려 하고 상황을 개선해보려 하지만, 관심도와 처벌 방안이 부족한 사회에서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별로 없었다.


마지막에 운수를 향했던 대사들이 마음에 꽂힌다. "말을 해, 말을. 왜 말을 못해." 과연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말을 할 기회는 줬는지, 그리고 말을 하면 제대로 들어주기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현실적이어서 무섭고 괴로웠던 연극이다. 그러나 세심한 연출 방향이 돋보였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는 작품이다. 더 많은 이들이 관람하고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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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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