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2) 첫 아르바이트 [사람]

글 입력 2021.09.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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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여 년 전, 수능이 끝나고 입시 결과가 채 나오기도 전에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수능 점수만으로 대학을 가는 정시 전형보다는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3년 성적으로 대학을 가는 수시 전형에 총력을 기울였기에 내게 수능 성적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6개의 수시 원서 중 교과 전형으로 넣은 한 대학의 수능 최저등급만을 맞추면 그만이었고, 조건도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유독 모의고사에 약하기도 했고,  중학교 때부터 워낙 내신(학업 성적) 특화형 인간이었던지라 당연히 수시 전형으로 대학 갈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수능 준비 역시 쉬엄쉬엄하고 있던 터였다. 수능에 대한 부담이 덜했던 또 다른 이유는 수능을 앞두고 수시 전형으로 넣은 대학 하나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6개의 수시 원서 중 6지망이긴 했지만, 입시를 또 한 번 도전할 각오와 생각까진 없었던지라 일단 재수는 면했다는 생각으로 남은 입시는 마음 편히 임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시 전형으로는 수시 전형으로 넣은 대학들조차 지원하기 간당간당할 걸 알았기에 수능 때까지 최저등급만 유지할 정도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여유를 부렸다. 수능 당일 모든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한 달 뒤 성적표가 통지될 때까지 대부분 과목 성적을 맞춰보지 않은 건 물론이다. 학교에서는 수능이 끝난 고3 학생들을 점심 식사 후 바로 귀가시켜 주었고, 수능이 끝난 뒤에도 모든 수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몇 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한결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나는 이때 고급호텔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일정이 조금 빡빡하다 싶으면 점심을 거르고 해당 장소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날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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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르바이트는 준비 단계부터 만만치 않았다. 근무가 있는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편도 40분 이상의 거리를 이동해야 했거니와 출근 도장을 위해서는 매일 근무 시작 전 정해진 장소로 가 출입명부를 작성하고 탈의실로 또 한번 이동해 근무복으로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에 집에서 넉넉잡아 1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시간이 얼추 맞았다. 그러나 제법 어렵게 꿰차고 들어간 자리였기에 소중한 첫 아르바이트 기회를 이대로 날려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호텔 아르바이트는 생각했던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고되었다. 무릇 남의 돈 받고 일하기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한평생 책상에만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공부만 해오던 고등학생이 난생처음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온종일 서 있어야만 하는 정반대의 작업을 처음부터 쉽게 소화할 리는 만무했다. 긴 학창시절만큼이나 아르바이트를 새로 적응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에 두어 번 나가는 일정이었다면 또 모르겠다만, 나 같은 경우는 일주일에 기본 5일, 하루 7시간 이상은 족히 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간별로 출근하는 요일이 달랐고, 매일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다르긴 했지만, 온종일 9시간에서 10시간을 일하는 날도 잦았다. 더불어 귀빈 손님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호텔 근무였던지라 중간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앉아 있는 시간도 거의 없어 초반 몇 주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서 풀썩 쓰러지곤 했다.

 

굽이 낮은 신발을 신고 근무하다 보니 집에 오면 더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바닥 전체가 욱신거렸다. 부모님은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문 앞에서 어기적거리는 나에게 매일 발 마사지를 해주시곤 했다. 밤사이 마사지와 잠을 통해 비축한 에너지는 다음날 근무가 끝나고 나면 금세 바닥나기 일쑤였다. 일에 대한 적응보다도 장시간 근무하는 것에 대한 체력적인 부담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체력이 강하다고 자신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 보니 영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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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최소한 체력적인 측면에 있어서 내게 유효했다. 몇 주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집에 오면 녹초가 되던 나날들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새벽까지 넷플릭스 드라마를 챙겨볼 여유까지 갖게 되었고, 10시간을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발바닥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사지를 생략하거나 일찍 잠들지 않아도 다음 날 무리 없이 출근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근 몇 달간 호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몸은 점차 고단한 일정에 완벽히 적응해나갔고, 이후로는 온종일 외부 일정이 있을 때도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활동 가능한 비장의(?)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으로 몸이 아니라 머리로 새로운 일을 익히는 데도 몇 주간의 시간이 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같은 시간대에 일하는 분이 매일 2~3명씩 있기도 하였고, 동료분들 외 지배인(매니저)님까지 항시 대기하고 있어 틈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일을 배워나가며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토록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냈던 첫 아르바이트를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뽑았느냐? 모름지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도 분명 있었지만, 내가 대학 입학 전까지 이곳에서 끝끝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엄청난 삶의 만족과 행복감 역시도 함께 누렸기 때문이리라. 이제부턴 아르바이트 당시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여러 사건과 사유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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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장 (속물적이고) 일차원적인 이유는 ‘돈’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호텔은 월급제가 아닌 주급 제였기 때문에 매주 특정 요일이 되면 지난 주간에 일한 돈이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왔다. 최저시급이었음에도 주5일 이상, 기본 7시간 이상씩을 일하니 한 주간에 들어오는 돈만 해도 학창시절 월 단위로 받던 용돈보다 몇 배는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당시에는 그 소박한 용돈으로 어떻게 한 달 동안이나 버틸 수 있던 건지 여전히 의문이긴 하지만. 역시 인간이 적응의 동물인 탓이겠지. 어찌 됐든 이제 더는 부모님 용돈에 모든 소비를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내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내손으로 직접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돈은 나의 생활습관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시간도, 비용도 늘 넉넉지 않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무언가를 고르고 행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친구들과 나는 당일 급식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학교에서 저녁밥을 제공하지 않는 달이면 늘 가까운 편의점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동네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때도 주변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을 사 먹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일주일 단위로 돈이 수중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비의 여유로움이 늘어나고, 돈의 씀씀이가 커졌다. 전처럼 부모님 눈치를 보며 돈을 꾸거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던 때가 확연히 줄어든 것은 물론, 문화 향유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갈수록 오르는 푯값 때문에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면 한 달에 두어 번 갈까 말까 했던 영화관도 점점 발걸음을 향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극장가에 들르기도 하면서 넷플릭스나 왓챠 등의 OTT 플랫폼 역시 여러 개 구독하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영화뿐만 아니라 기본 10만 원 내외의 가격대를 선보이는 콘서트도 얼마든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사전 예매에 임했고, 평소 눈에 담아두었던 브랜드 옷을 불현듯 사 입기도 했다.


통장 속을 부유하는 무형의 금빛 지폐들이 나의 문화생활과 소비 지평을 지대하게 확대해주었음은 자못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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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주 몇십 단위의 돈이 통장에 들어왔다고 해서 매일 흥청망청 돈을 쓴 건 아니었다. 한창 수능이 끝난 시기면 이곳저곳 수험생 할인 혜택을 받으러 친구들과 놀러 다닐 때라지만, 나는 애당초 빡빡한 호텔 일정으로 누군가를 만날 기회조차 거의 없었기에 그만큼 외부 지출을 아낄 수 있었다. 또 메인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돈을 볼 때면 늘 기분이 좋아져 주급 날에는 미리 정해둔 비율대로 틈틈이 돈을 저축했다. 대책 없이 모아둔 돈은 훗날 개인적인 투자로 요긴하게 쓰이거나 이전부터 갖고 싶던 고가 상품을 구매하는 데 간간이 사용되었다.


그렇게 장만한 첫 고가 상품이 바로 빔프로젝터다. 물론 빔프로젝터를 새로 들였다고 해서 영화관에 가는 횟수가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대학 입시가 끝난 뒤 시간적 여유가 부쩍 늘어난 때와 상품 구매 시기가 맞물려 더욱 미친 듯이 영화에 몰입하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상품을 구매한 이후 지금껏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화면에서 재생된 수많은 영화를 떠올릴 때면, 이제는 내 삶에서 빔프로젝터 없는 삶은 여간 상상하기가 힘들다. 때로는 와인과 카나페를 곁들이고, 때로는 팝콘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관람하면서 분에 넘치는 행복감을 느낀 때도 많았다. 나의 작은 영화관에서 함께해준 빔프로젝터 덕에 말이다.

 

혹자는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분명 우리의 삶을 더욱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임은 - 적어도 내게 있어 - 자명했다. 그러니까 아마 내가 호텔 아르바이트의 고된 일정을 매일같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매주 찾아오는 단비 같은 주급 날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 다음 편에서 계속

 

 

[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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