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알콜과 연애 중입니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 [도서]

술의 단맛, 녹즙의 쓴맛, 인생의 짠맛과 매운맛
글 입력 2021.05.2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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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배달원강정민_표1.jpg

 

 

해당 글은 작품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Prologue.



녹즙배달원? 제목부터 강렬해서 지나치기가 어려운 책은 오랜만이었다. 녹즙배달을 소설의 소재로 본적도 별로 없을 뿐더러 녹즙 아주머니가 아닌 젊은 나이의 여성이 이 알바를 하게 된 사연이 궁금해졌다. 호기심만으로 어떤 의무감이나 위로에 대한 기대 없이 책을 펼치는 간만의 설레는 기분이 좋았다. 이 호기심을 풀어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하며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되었다. 첫 장부터 그랬으니까.

 

*


슬프고도 명랑한 작가 김현진의 신작 소설 / 숙취에 시달리며 활력을 전파하는 강정민의 씩씩하고 눈물겨운 생존기 / 술의 단맛, 녹즙의 쓴맛, 인생의 짠맛과 매운맛!

 

에세이 《네 멋대로 해라》,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의 저자 김현진이 슬프고도 명랑한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저자는 녹즙 배달원으로 2년 가까이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녹즙 배달의 세계를 소설로써 구축해낸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은 여성 청년이 배달 노동을 하며 웹툰 작가라는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성장기다.

 

주인공인 정민은 녹즙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녹즙 판매 수당을 받는 ‘위탁판매원’에 가까운 존재로,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녹즙값을 상습적으로 연체하거나 성희롱을 일삼는 손님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그의 고달픈 일상을 달래주는 건 오직 술뿐이기에, 정민은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지만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친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알코올의존증 완치 판정을 받고 웹툰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모르셨겠지만 요즘엔 ‘알콜의존증’입니다


 

요즘은 알콜 중독이 아니라 알콜의존증이라 한다며, 의존증이란 말은 중독보다 병세를 더 가벼워보이게 하지만, 실상은 다를 바 없다는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이보다 더한 연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술에 대한 애정 가득한 묘사와 찬미를 해놓은 이야기의 시작처럼 솔직한 설명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술을 어느 정도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즘 시국에는 자리가 없어서, 혼자 마시기는 어색해서 술을 마주한지 오래되었다고 한다면, 정민에게 이건 술을 멀리할 핑곗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술은 언제든 그의 슬픔이 어느 정도의 강도로 몰려오든 다 품어줄 박애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종에 따라 투명함 혹은 황금빛 거품으로 피로를 안아주는 그것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자신은 이내 그 품에 안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민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글쎄, 내가 보기에 그 말은 술을 계속 마실 핑계이자 살기 위한 정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술은 몸을 망치지만 삶을 어떻게든 지속하기 위해 마시게 된다는 역설이었다. 그만 마실 타이밍을 잴 줄 아는 애주가가 되지 못한 정민은 그런 술의 굴레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술을 사랑하게 된 사연(feat.녹즙배달)



그래서 지금 정민의 상태는 세 가지 단어 정도로 설명할 수가 있었다.


#알콜의존증 #녹즙배달원 #웹툰작가지망생


정민이 술을 사랑하게 된 사연은 기구하고 복잡했다.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어머니는 손위의 남형제보다 능력이 뛰어난 차녀 정민을 대학에도 보내지 않으려 했었다. 어릴 때부터의 차별에 익숙해져 있던 정민은 자신의 손재주로 언젠간 웹툰 작가가 될 것이라며 대학에 들어가 누구보다 열심히 알바와 공모전으로 등록금을 직접 벌어 다녔다. 곰팡이가 그득하지만 그런대로 셋방을 구해 살았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행복하고 풍족한 삶은 아니었지만 나와 사는 것이 훨씬 편했다.

 

마침내 게임회사에 취직하였을 때는 유저가 ‘색정적’으로 느낄 만한 캐릭터를 그려내며 직장 내 온갖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으면서도 후일의 웹툰 작가 준비를 준비하느라 4년을 버텼다. 그마저도 자신이 부어온 적금이 남형제의 결혼에 탕진되기 전엔 나름의 희망이 있었는데, 삶이 가혹하다 느낄 때마다 부어온 홧술은 통장 잔고를 보고 확 늘어버렸다.

 

*

 

가족과의 절연은 당연한,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생활 전선의 더 깊숙하고 아슬한 곳으로 흘러온 곳이 녹즙 배달이었다. 녹즙배달은 특수고용노동직이다. 말도 복잡한 이 특수고용노동직이란, 법적으로는 개인 사업자로서 예를 들자면 택배 기사를 들 수가 있다. 독자적인 사무실, 점포, 작업장이 없고 계약된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노동제공 방법, 시간 등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는 형태로 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아 고용보험 가입이 블가하여, 아무런 고용 상의 혜택 및 복지와 법적보호를 받을 수 없는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계속 정민을 보고 물었다. 어쩌다 젊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지, ‘험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하게 됐는지 으레 물으며 자신 혹은 자신의 자식이 정민보다 나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차 의례적인 인사이지만, 그래도 난 사람 도리 한다 싶은 일방적인 체면 세우기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티가 나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래, 매일 밤 술이 당길 만한 사연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사람들이 알고보니 심각한 알콜의존증인 사례가 넘쳐 나듯, 태생이 불쌍하고 불완전한 이들만 녹즙배달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닌데 그들은 그걸 몰랐다. 얼마전까지 사무직노동자였던 정민도 그럴 줄은 몰랐다. 살기 위해 잡은 알바가 녹즙배달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젊은 여성이 노동법의 사각지대와 고용불안 상태에 있으면 이토록 접근하기 쉬운, 가성비 좋은 잠재적 하룻밤 상대가 될 수 있음을 한번 더 확인할 뿐이었다.


 

 

연애의 끝은 홀로서기



“생각해, 생각해, 계속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지는 거야.”


똑같이 흘러가는 줄만 알았던 정민의 인생도 민주와 준희가 있어 가끔 괜찮았다. 민주는 세상 제일 가는 술친구였고 준희는 묵묵한 등대였다. 민주가 스토킹과 데이트폭력(사실상 데이트폭력이 아닌 젠더 권력 차이에 의한 성폭력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다)을 겪고 인도로 떠나가고, 준희의 설득으로 마침내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 정민.

 

민주의 사건과 준희의 말은 정민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결심과 결정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었다. 정민은 지독한 연인인 술을 끊어냈고, 그를 망치러 왔던 구원자를 밀어내기에 성공했다.


언젠가 민주가 늘 되뇌던, 계속 생각하라던 말은 사실 정민이 아니라 나에게 와닿는 말 같았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 호흡이 가빠져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계속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가늠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음 스텝을 위해 한 발 물러나든, 한 발 나아가든, 멈춰 있든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굴복하지 않아야 할 상대에게 지게 되니까.


*


사회에서 말하는 ‘한창 좋을 때’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사회적 지위의 지표가 되는 연봉과 성별 중 어떤 것이 ‘힘듦’과 ‘차별’에 더 기여하는 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생략하겠다. 어느 직업을 갖든, 얼마의 연봉을 갖든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무게, 위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 여성이 취약계층에 있다면 불리한 현상이 삶에 주는 타격은 더 크고 가시적으로 보인다.

 

요즘 말하길 꺼려 한다는, ‘페미’로 시작하는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니 하는 것들은 이 책의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페미니즘 책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굳은 결심과 홀로서기라는 여느 에세이나 성장 소설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사실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었을 뿐이다.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현상이 곳곳의 사람들을 힘든 처지로 몰아넣고 있음을 서술한 책이다. 눈을 크게 뜨고, 끊임없이 생각해서 삶에 지지 말라는 응원가이자 홀로서기를 위한 책이다.


정민의 삶은 고단했지만 경쾌한 문체로 쓰인 어느 녹즙배달원의 이야기도 사람들이 찾아주는 생활툰의 소재가 된다며 이야기는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으니 감사하다는 작가의 담담한 인사도 좋았다. 툭툭. 하지만 정성스레 꺼내 보여준 진심 100%인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 눈물 젖은 신파보다 호소력 있고 다가가기에도 부담이 없어 보이지만 알맹이는 무엇보다 단단한 이런 이야기가 좋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생각하자는 것이다.

 

P.S. 강정민 파이팅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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