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상(理想), 내가 쓰고자 하는 글 [사람]

내가 정하는 온도, 속도 그리고 농도
글 입력 2021.05.2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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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하는 온도, 속도 그리고 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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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5월 중순이 이자 6월을 바라보고 있다. 에디터의 활동이 끝이 보인다. 에디터 활동을 계기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시작했던 블로그도 자리를 잡고 있다. 나 자신 자체도 예전 글들을 읽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글을 발견했다. 혼자 뿌듯하게 칭찬한다. 보람차다. 쓰면 쓸수록 달라지고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생겨났다. 혼자 나만 볼 수 있는 공간에, 나의 글이라는 것을 나만 알고 있는 곳에서 쓰는 글이 아닌, 내 이름을 걸고 누군가에게 공개적으로 글을 보여준다. 28년 만에 나의 취미를 보다 전문성 있는 활동으로 구축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 같던 모래성에서 지금은 어떻게나마 뚝딱거리며 뼈대를 만들고 있다.

 

항상 나 자신에게 질문한다. 내가 부족한 게 뭐지? 뭔데 내가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지 않는 거지? 이 습관은 비단 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업무를 할 때도 혹은 그림을 그릴 때도 아니면 대화를 할 때도, 뭔가 내가 생각한 대로 표현을 하지 못했거나 결과물이 그렇지 못할 때, 나는 묻곤 한다. 어때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인정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근데 어느 포인트를 잡고 뾰족하게 고쳐나갈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이 질문을 들으면 당황해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이 질문에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내 욕심인 것을 안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대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내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자신의 대답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게 아닐는지, 혹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생각과 사고 따위가 하기 싫은데 생각을 요구하는 나의 태도가 맘에 안 든다든지. 다양한 감정과 표현을 통해 나는 찰나의 표정을 읽는다.

 

나의 온도와 속도는 상대와 같지 않다. 나라는 직선과 상대의 직선은 평행선을 달리며 거리를 좁히거나 혹은 멀어져간다. 간혹 직선끼리의 충돌이 생겨 갈등을 빚거나 오해를 산다. 인간은 생각보다 감정적인 동물이다. 애초에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떻게 온도와 속도를 맞추면 이제 또 '농도'가 문제 된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관점을 가진 별의별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따져보면 성악설을 지지한다. 인간은 자기 위주다. 어떻게 보면 나도 그렇지 않은가?

 

나의 작품을 무엇보다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혼자 땅굴을 파며 고민할 시간을 줄이고자 상대에게 '판단'이란 무례한 질문을 한다. 상대는 이 '판단'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남겨질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다. 나는 상대의 생각을 이용하고 훔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욕심은 '어때요?'라는 질문에 담는다. 당신을 이용하고 싶다는 나의 비열한 행동을 눈치챈 나머지, 슥하고 피해 가는 사람도 없진 않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사유를 대하는 온도와 속도를 맞는 이를 선별한다. 선별한 사람 중에서도 또 솎아낸다. 나쁘다고 표현하지 마라. 당신도 이미 하는 짓이다. 이는 유유상종, 혹은 사회생활을 견디며 당신들의 곁에 남는 친구들에 대한 또 다른 표현법일 뿐이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럼, 말을 왜 그렇게 표현하냐? 그래 인간은 상당히 감정적인 동물이고 자기 위주다. 그렇기에 다름을 배척하고 자신을 더 숨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허울뿐인 말 아래 결국에 나와 다름을 존중하고 배척하는 행동은 요즘 21세기에 굉장히 적절하면서도 모순적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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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혹여 글을 읽으며, 그냥 사회성이 다소 모자란 사람이 지껄이는 궤변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뾰족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이 글의 본질을 이해 못 한 것이고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에 실패했다는 증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가며 '나'라는 사람이 가져가는 색과 그를 위한 자아 성찰을 위한 시도, 또 다름을 배척하면서도 존중한다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씀으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글이 가질 방향성을 다듬고자 한다. 쉽게 말하면 문체, 주제, 생각과 사유를 다듬는 것이고 그 끝은 또 나의 영역을 파괴하고 확장하며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도 내 욕심의 연장선과 같다. 나의 세계를 더 확고히 다지기 위해 글을 계기로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과 같다. 불현듯 이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은 4월에 읽은 도서인 <출판저널 522호>에서 생각한 독서 근육에서 파생된 조각 덕분이다. 시작은 아래와 같다.


 

무엇으로 나는 사유하고 사유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나는 영감을 받고 받은 감정을 글이든 그림이든

직접적인 말보다 만들어낸 것을 좋아한다.


 

그럼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들을 좋아하는가?

 

가치 없는 것들이 좋다. 순간의 찰나를 담는 것이 좋다.

휘발성이 강한 쓸데없는 감정을 체감하는 것이 좋다.

쓸모없는 예쁨이 좋다. 순간을 위해 강렬히 불타오를 수 있는 빛깔이 좋다.

내일이 없는 오늘이 좋다.

위태롭고 처연한 이야기들이 좋다.

밑바닥 저 너머로 사라지는 그늘이 좋다. 투명한 밑바닥이 좋다.

그저 속없는 아름다움이어도 좋다.

다른 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내게 울림을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리.


 

좋다. 그럼 무엇을 보는가?

 

특정하지 않는다. 종류마다 주는 울림이 다르다.

글은 나에게 사유할 힘과 시작할 계기를 주고

그림과 사진은 표현력에 힘을 실어주며 활자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내게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토대를 되어 오감의 디테일을 살려준다.


 

그럼 다시 한번 묻는다. 영감을 받아 탄생한 창작물이 무슨 역할을 하길 바라나?

 

별거 없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생각

그 자체로 진득하게 남아주는 것 자체가 의미다.


 

위의 질문들이 슬슬 한 부분으로 매몰되기 사직하는 나를 구원해줬다. 내가 주체가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나를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근간은 '나'로 두어 지식과 기술을 갖추기 위해 달리는 도중 길을 잃을 때면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소위 '그릇'을 키울 수 있다. 그 시점에 한 번 정리해보자. 똑같은 '나'를 표현하는데 더 달라진 문체와 폭이 넓어진 어휘, 그리고 글쓰기가 더 자연스러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장'이다.

 

 

폼생폼사

 

더 적절한 어휘나 표현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폼생폼사가 가진 뜻과 무게의 격이 딱 맞다. 멋에 살고 멋에 죽는, 그렇다고 그 멋이 기깔나게 멋지지도 않다. 평범하다. 예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나는 보통 그렇다. 그렇다고 그 예쁨이 우리가 말하는 외모지상주의의 그러한 부류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예쁨의 기준, 한 주제를 보고 탐미하고자 하는 부분. 쉽게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자면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유희열의 마음과 같다. 무언가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것, 내가 발굴해내는 것, 아니면 발굴할만한 무언가를 내가 만들어내는 것. 빚어내는 것. 최근 내가 발견한 탐미는 영화 <싱글맨>, <아가씨>이다. 이미 여러 번 넘게 본 영화지만,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감상했다.

 

각자 가진 힘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영화는 예쁘지만 지나치게 본인의 것이다. 넘볼 수 없는 영역 같다. 그래서 더 가치 있다. 그 증거로 영화를 두고 왈가왈부도 많다. 또, 가장 최근에 다시 본 <먼 훗날 우리>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싱글맨>과 <아가씨>는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는 파도 같다면, <먼 훗날 우리>는 조용히 흐르는 강줄기, 혹은 큰 호수의 잔 흐름 같다. 햇볕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이 인상 깊고 손을 넣어보자니 시리도록 추워서 함부로 어찌 못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 영화가 가진 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기준을 내가 추구하는 탐미적 성향을 바탕으로 삼는다. 어떻게 보면 나의 안목을 말하는 것과 같은데, 안목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표현을 못 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게 능력이라 생각하는데, 아직 나의 능력은 내가 만족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인 만큼, 내포한 지식도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딱 폼생폼사가 알맞다.


 

정제된 담백함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선호한다. 근데 핀트가 좀 다르다. 감정이 넘칠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깔끔함이 좋다. 밀도 높게 꾹꾹 눌러 담은 감정 상자를 정육면체로 깔끔하게 담은 담백함이다. 밀도가 너무 높아서 들어갈 틈이 없도록 10의 크기를 1로 만든다. 상자를 열어 풍덩 하고 들어가면 얼마 들어가지도 못한 채 몸이 둥둥 뜨도록, 그 단단한 밀도가 피부 결로 느껴져 감히 헤집을 수 없다고 판단이 들기 시작할 무렵, 서서히 젖어 들어가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 깊은 담백함을 원한다.

 

정제된 풍부함이 주는 다채로운 감정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여운에 취해 이것저것 공상을 하게도 만들며, 감상이 만들어낸 또 다른 영감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진다. 그렇다. 감정이 와닿지 않은 표현과 문체만으로 담백함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정제된 기준점을 만들어 주고 싶다.

 

 

낮은 곳부터 시작하는, 평이하지만 울리는 전달

 

나는 특별하지 않다. 내가 하는 것도 특별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저 나에게 알맞은 취향과 기호를 좀 더 알아가는 쪽에 속할 뿐, 세상을 둘러보면 특별한 사람들 천지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큰일을 하는 거지? 큰 사람이 되려면 저 정도로 해야 하나? 나는 잠도 많고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나는 지금 내가 너무 좋은데, 이미 견고하게 쌓은 그대들의 높은 이상을 쳐다보는 나는 한없이 낮아진다.

 

나의 높이는 어디까지일까? 머리는 위로 향해도 가슴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내려간다. 더 내려가 밑으로 더 내려본다. 가슴이 가르키는 지하는 깜깜하다. 깜깜한 곳에 끔뻑이는 눈동자가 즐비하다. 끔뻑이는 눈동자 사이에서 반짝임을 발견한다. 그러자 낮은 곳을 가르키는 가슴이 울린다. 그리고 그 공명이 지하 속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어둠 속에서 맞잡은 두 손이 따뜻해진다. 그렇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나를, 당신과 다를 바 없는 나에게 주는 위로를 공유한다. 위로가 필요 없다면 받지 않아도 된다. 단지 언제나 깊은 내면에 있는 자신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음을 알고 있으면 된다. 아무도 그 위로가 필요 없다 하여 반짝임이 사그라질 이유는 없다. 혼자여도 강하게 빛날 수 있는 내면은 하찮게 보여도 굉장히 강하다.

 

 

진실한 대화

 

세상이 예민해졌다. 각박해졌고 실로 체감하고 있다.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21세기에 극단적인 이분법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 존중이란 이름 아래 기만한다. 고전적이지만, 시인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말하고 싶다. 누구나 배우는 시지만 개인적으로 담긴 뜻을 굉장히 좋아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그렇다.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다양성이라는 허울뿐인 말 아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도 흘리지 않았는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맞는 말이어도 진심으로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쉽지 않다. 이 과정이 되려면 상대와 위에 말한 온도, 속도 그리고 농도까지 맞아 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비로소 이뤄진다. 그러니 얼마나 세상 직장인들이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 감히 예측도 되지 않는다.

 

인터넷상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스트레스와 호전적인 의견을 분출하는 사람이 많다. 현실은 그나마 덜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얼마나 부글거릴지는 절대 예상할 수 없다.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길 거부한다. 알아가도 좋은 정보만, 혹은 자신이 피로하지 않을 정도만 받아들인다. 무조건적 TMI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자신을 오픈해 친해지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게라도 자기 뜻을 완곡하고 부드럽게 전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절박해 눈앞에 있는 그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건 가족이나 친구한테 말하는 게 맞지 않냐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털어놓는 그 친구가 정말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서, 혹은 친구가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의 친구가 맞는지, 이 긴 평생을 살면서 당신의 TMI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며 그 방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떻게든 흘러간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면 그렇다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세상에 당신을 닫아놓지는 않았으면 싶다. 듣고 싶지 않은 무수한 말에서 우리가 찾는 무언가를 발견할지 모른다. 단순히 열정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진실성을 가져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내가 글을 좋아하고 나누는 방식

 

한 가지의 뜻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소비하고 쓰는 방식이다. 문체와 문장의 순서가 주는 힘은 대단하다. 하다못해 어눌한 문장력으로 구성한 유치원생의 글도 효과가 크다. 그 이유는 가장 솔직한 감정을 문장에 담았기 때문이다. 문장이 반복되는 것이 공적인 글에서는 잘못된 글일 수도 있지만, 반복의 힘은 강렬하고 문학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한 문장을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채로운 표현이 주는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문장으로 써야 글을 읽는 사람에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제대로 전달될까를 고민하는 것도 있다.

 

같은 말을 해도 우리는 100% 모두 같은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글을 소화하는 시간도 다르고 사용했던 공간도 주제도 다르니 어쩔 수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간극은 더 심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간혹 그런 사람도 봤다. 나의 언어가 너의 언어와 다르다. 너의 수준이 나의 수준과 맞지 않으니 나를 따르라, 이것이 긍정적으로 이것이 나의 지식과 기술 함양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면 모르겠다만, 보통 소통의 단절을 초래했다. 적어도 나의 경험은 그렇다. 아마 그 사람은 평생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시기 질투하며 여생을 보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방식을 가진 사람도 언젠가 방식이 변하기 마련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나의 방식을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온다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단지 사회에서 마주하는 또 다른 과거를 기다려주면 된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글에는 선택을 주고 싶다. 나의 글은 이렇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렇다. 너는 어떠니? 라고 물어보고 싶다. 대답하지 못해도 좋다. 이 글을 계기로 자신을 알아가는 시작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꼭 계기가 될 필요도 없다. 본인은 좋아하는 것을 풀어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강하게 나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어찌 보면 확신과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의문도 든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더 완벽해질 수 있는데 능력의 한계를 재단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좋아하지만 아직은 어디에 내놓기 부끄럽고,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써 내려간다. 가능성을 가진 채 평생 사는 것보단 누군가에게 나누고 성장하는 '평생'이라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 미숙한 모든 '처음'을 담고 싶다. 이게 내가 글을 좋아하고 나누는 방식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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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소화하기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호흡이 긴 매체고 그다지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아니다. 호기롭게 읽기 시작해도 금방 물린다. 하얀 종이 위에 적힌 까만 글자가 가득한 책은 왠지 모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도 읽는 행위가 자기계발에 도움 된다는 세뇌가 어릴 적부터 심겨 있어 선뜻 쉽게 손에 붙잡히긴 한다. 그 뒤로는 도전이 시작된다. 오래 앉기부터 그리고 긴 시간 동안 글자에 집중하기, 그리고 이해하고 사유하기.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이르는 것.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과정이 익숙해져도 걸리는 시간과 체감하는 것이 조금은 감소하였을지 몰라도 다른 것에 비해 시간이 더 들어가는 사실은 변함없다. 요즘 날의 유튜브도 길면 보지 않는다. 짧고 간결하며 직관적이어야 한다.

 

독서의 장점을 아무리 나열해도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 투자가 상당히 있기 때문에 하루를 쪼개어 사용해야 한다. 쉬는 시간에도 일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취미가 아니라 또 다른 공부가 될지도 모르는 게 독서다. 그리고 맞는 말인 게 독서는 나의 취미이기도 하지만 과거형일 때도 있고 현재형일 때도 있으며 또 정말 공부 같은 주제의 책은 말 그대로 공부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된다. 읽는 속도도 더뎌지고 흥미도 금방 떨어지는데, 오기로 다 읽고 만다. 그렇다고 읽은 시간에 비해 지식이 머릿속에 바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오기로 읽은 책은 결국 휘발돼서 날아가더라. 들인 시간의 가치를 찾으려면 또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은 한 번의 독서로 끝날 수도 있지만 몇백 장의 글자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한 번으로 부족하다. 물론 나보다 머리가 더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그럴 필요 없다.

 

나에게 글은 취미이자 내 삶을 환기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진득하게 붙어있지 않아도 계속 눈길도 가고 손에도 집힌다. 다 읽지 못해도 책을 사는 게 싫지 않다. 전자도서보다도 종이책을 사는 게 좋다. 가끔 도전되어 괴롭히긴 하지만, 한 권의 책을 끝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욕심을 위해 책을 이용하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되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체감한 이후로 더 진지하게 임하게 됐다.

 

고백하자면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다. 사회가 정의해 높은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일지도 모르고 그저 대다수에 속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기준의 이상으로 미치지 못한다.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았고 굉장히 단발적인 행복으로 그쳤다.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책을 펴고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도 즐거워졌다. 의미 없는 투자에 의미가 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에 대한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취향과 사유가 주는 의미는 실로 대단했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 잡은 주제는 단 두 글자였다.

 

'이상' 내가 꿈꾸는 이상은 무엇일까? 꿈꾸는 이상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이룰 것인지, 그리고 이루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뭔지 생각한다. '이상'이라는 한 단어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이 글을 탄생시켰다. 끝으로 나는 글을 통해 창조할 뿐이다. 내내 독서와 글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당신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남들이 말하는 쉬운 선택이 있고 편한 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 맘에 들지 않기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좋아하는 것에 온갖 열정을 바치거나 미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 된다. 노력은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을 찾자, 그것부터 대단한 시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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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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