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목소리를 위한 좌석, 음악극 '태일' [공연]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글 입력 2021.05.0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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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의 모습과 불행을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서사를 비판하는 말이다. 자극적인 고통이나 불행을 부각하는 것은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고 인물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해 극적인 서사 구성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는 인물과 서사를 단편적이고 납작하게 만든다.

 

타인의 빈곤, 장애, 고통, 죽음은 작품에 ‘이용’된다. 특히 실존 인물을 재현할 때에는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이나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전시하고 소비하고 있지 않은지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원치 않는 동정심이나 공감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선량한 의도에서 제작된 작품조차 때로는 타인을 쉽게 공감하고 대상화하곤 한다.

 

음악극 <태일>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삶을 재현하면서도 그의 삶과 죽음을 ‘불행 포르노’로 만들지 않고 재현의 윤리를 지키려 노력한다. 음악극 <태일>의 포스터에는 ‘청년 태일의 목소리를 기억하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문구처럼 <태일>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단순한 연대기를 그리지 않는다. <태일>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겪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기에 그런 결정에 이르렀는지, 평범한 ‘청년’ 태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태일>은 ‘목소리’에 집중한다. 배역 명 또한 ‘태일’ 역이 아닌, ‘태일 목소리’, 그리고 ‘태일 외 목소리’ 역으로 되어 있다. <태일>이 시작된 곳 또한 ‘목소리 프로젝트’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박소영 연출가, 이선영 작곡가, 장우성 작가, 이 세 명의 창작자가 상업적인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연을 제작하고자 모인 창작집단이다. 이들은 왜 ‘목소리’에 주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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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 연극은 관객을 그 세계로 몰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관객이 극을 보면서 현실 세계를 떠올리지 않아야 극의 세계와 인물에게 충실히 몰입할 수 있다. 무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 배우는 인물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태일>은 이 공연이 ‘공연’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해 ‘소년의 의문’이라는 첫 넘버를 부른다. 넘버가 끝난 후에 배우들은 극 바깥으로 빠져나와 인물이 아닌 배우로서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배우 자신이 ‘전태일’에 대해 알고 있었던 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자신들이 태일, 태일의 가족, 동료, 여공 등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라 직접 이야기한다. 마치 배우가 관객에게 태일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그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배우들은 노동 운동을 하기 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며 부자가 되는 날을 꿈꾸던 태일의 삶을 이야기한다. 가족을 원동력으로 열심히 살아가던 태일의 모습을 보여준 후, 다시 배우들은 관객에게 말을 건다.

 

배우들은 각자의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원동력은 매 공연마다, 배우마다 다르다.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들은 각자 오늘의 내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태일은 가족을 원동력으로 가야만 하는 그 길을 걸어갔다. 우리는 무엇을 원동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태일의 삶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태일>은 배우와 관객이 같은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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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평화시장에서 노동을 하고, ‘바보회’를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태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태일은 직접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여 노동청에 진정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노동청 근로감독관은 태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신문에 기사가 실려도 그때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태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데도 ‘그렇지만 가야 한다’고 다짐하며 다시 노동청을 찾아간다. 태일은 근로감독관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외치지만 감독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태일은 ‘왜 우리 얘기를 듣지 않느냐’고 울부짖는다.

 

이 장면 직후, 무대는 암전되고 근로기준법의 낭독음성이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태일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근로기준법은 ‘태일 목소리’ 역 배우의 음성을 통해 읽힌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는 이가 없었기에 어디에도 가 닿지 못했던 태일의 목소리가 비로소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찬찬히 관객들에게로 전해진다. 지금 여기, <태일>을 보고 있는 관객과 배우들은 그렇게 청년 태일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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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낭독이 흐르는 동안 배우들은 무대 곳곳에 놓인 수많은 촛불을 켠다. 극이 시작할 때부터 태일의 삶을 따라 하나하나씩 켜지던 촛불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태일의 죽음은 이 촛불들로 표현된다. 그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면 분명 극적이고 관객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그저 자극적인 도구로, ‘불행 포르노’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태일>의 마지막 장면에서 태일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무대를 돌아본다.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는 태일의 모습은 괴롭고 두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크게 외치며 광장으로, 무대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가 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일렁이고, 꽤 긴 시간의 적막이 흐른다. 그 적막 속에는 자극적인 죽음이 아닌, 그의 삶과 목소리가 전하는 의미들이 남는다. 첫 장면에서 배우들은 등장 후 짧은 정적으로 묵념을 하고 그의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촛불처럼 번져가는 그의 마음을 느끼고 생각하며 그를 애도하고 묵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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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은 태일의 삶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면서 그의 삶과 죽음에 예의를 갖춘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공연장 안에 있는 이들 모두는 태일의 목소리를 전하고 듣기 위해, 태일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 이 목소리를 들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을까. <태일>은 이 목소리들을 위한 좌석을 마련한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 주게

 

- 전태일 열사의 유서 부분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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