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본 고딩한테 빠진 썰 [만화]

만화 『빠졌어, 너에게』를 예찬하는 글입니다.
글 입력 2021.05.0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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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하게도, 아트인사이트에 이번 글을 유독 늦게 기고하게 되었다. 나는 최근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일본 만화 <빠졌어, 너에게>에 대해 쓸 예정이었다. 처음엔 그저 ‘좋다’ 정도의 마음으로 리뷰를 쓸 생각이었으나, 왜인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글을 어떻게든 써보려고 끙끙 앓는 동안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인 ‘하야시’와 ‘니카이도’에 대한 나의 마음 상태가 계속 변해왔는데 그건 사실 완벽한 덕질의 과정이었다. 멀리서 ‘음 저거 좋네.’ 하며 커피나 마실 고상한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빠졌어, 너에게>에게 정말 푹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글을 새로 쓰게 되었다.

 

 

 

『빠졌어, 너에게』, 와야마 야마 글그림/김진희 역, 문학동네


  

1. 첫 대면, “책 읽는 내가 귀여웠어?”

 

빠졌어,너에게 일본판.jpg

<빠졌어, 너에게> 일본판 사진

 

 

사실 나는 처음 <빠졌어, 너에게>를 접했을 때,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사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이 장면을 보게 된 건,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였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며 뭐라 대사를 던진 남학생이었는데, 일본어로 써져 있어서 뭐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얼굴이 굉장히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화장실에서 무슨 의중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이 만화가 궁금해졌다.

 

나중에서야 읽지 못한 대사가 “책 읽는 내가 귀여웠어?”라는 걸 알았고 나는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데..? (그것도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이렇게 자세히 뜯어보니 신기한 눈이야. 날 보는 건지, 보지 않는 건지…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어디서 보든 감상자와 눈이 마주치도록 그려졌다는데, 내 생각엔 몇 시간을 봐도 내 눈을 보는 건지, 다른 곳을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이야. 하야시 선배의 눈도 그래.’

 

<빠졌어, 너에게> p. 53

 

 

‘오묘’하고 ‘알 수 없는 눈’을 한 남학생의 이름은 하야시. 하야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후배 고마쓰의 생각을 들어 보니 내 생각이 마냥 오해는 아니었던 것 같다.

 

 

2. 첫 번째 완독, “묘하다..”

 

<빠졌어, 너에게>는 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남학생들의 일상을 그린 만화다. 총 8개의 단편으로 각각의 고등학교 이야기가 4편씩 나눠져 진행되는데, 가네가메 고등학교엔 4차원 소년 하야시가 있고 도쓰카 고등학교엔 음침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니카이도가 있다. 만화는 이 두 소년과 그 주변의 이야기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생각했다.

 

‘묘하다.. 정말 묘하다…’

 

친구에게 이 만화책을 소개하게 된다면 뭐라 설명해야 할까, 별다른 스토리가 없는데. 이 만화에는 으레 다른 만화에서 볼 법한 기승전결이 없다. 굵직한 스토리가 없으니 무슨 내용이냐 묻는다면 설명하는 내내 구구절절 구차해질 것 같았다. ‘그니까, 00고등학교에 하야시라는 남자애가 있는데 되게 사차원인 애야.. 근데 얘한테 뭔 일이 생기냐면,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닌데…’

 

그럼에도 이 만화가 시시하다든지 허무한 게 아니라 묘했던 이유는 설명하자니 구차해지는 듯한 그 내용이, 내용 자체로 소소하게 즐거웠고 은은하게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3. 입덕부정기, ‘왜 묘하지?’

 

‘나는 이게 지금 좋아서 한 번 더 읽는 게 아니다. 왜 묘한지 궁금해서 읽는 거야.’

 


빠졌어, 너에게 표지.jpg

가만 생각해보면 요즘 푹 빠진 배우 유태오나 NCT 127 쟈니 탐구를 대충 이런 식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만화가 왜 묘했는지 알아보고자 다시 펼쳐 든 책에서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바로 배경들이었다. 처음엔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두 번째로 보니까 와야마 야마 이 만화가, 생각보다 배경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배경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


 

만화가 다른 이야기 매체보다 빠르게 읽힐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내용 전개를 위해 작가가 과감하게 덜어낸 배경이 있다. 만화는 어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 위해 인물과 관계없는 것은 그리지 않거나, 인물과 배경을 철저히 분리한다. 그래야 독자가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에 집중하며 분산된 컷들을 자연스레 연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블라썸 예시.jpg

(네이버웹툰 <청춘 블라썸> 7화 장면)

보통 중요하지 않은 배경으로서의 인물은 표정을 없앰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둔다.

 

 

그런데 <빠졌어, 너에게>에는 시선이 분산될 수도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그려낸 배경의 인물들이 보였다. 읽는 동안 이렇게 한 컷 한 컷이 알찬 만화는 오랜만이었다.

 

 

빠졌어, 너에게 1.jpg


빠졌어너에게 2.jpg

(<빠졌어, 너에게> p. 108, 109 배경)

배경에 여자아이의 시선이 두 컷에 담겨있다. 지나칠 수 있지만 막상 발견하면 재미있는 표정이다. 이런 식의 인물이 이 만화의 꽤 많은 배경에 그려져 있다.

 

 

시선이 분산되면서까지 배경을 자세하게 그려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빠졌어, 너에게>의 이런 점이 이 만화가 주는 기분 좋은 묘함에 큰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소소한 에피소드와 이와 같은 컷들이 만나, 마치 하야시와 니카이도가 이 만화의 절대적인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우연히 오늘 하루 운 좋게 카메라에 얻어걸린 아이들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와야마 야마의 다음 단편에선 배경에 있던 인물들 중 한 명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페이지를 왔다 갔다, 만화를 몇 번이나 재독하면서 이유를 찾긴커녕 매력적인 디테일만 더 발견한 느낌이다. 자기 전에 누워서 <빠졌어, 너에게>의 재미있던 배경을 떠올렸다. 이렇게 시간을 쓰고 나서야 ‘누워서도 생각나면 그거 이유 불문 무조건 사랑인데~’라고 노래를 불렀던 평소의 내가 생각났다.

 

 

4.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사람.. 지금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덕질 대상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대상을 예찬하고 있는 그 사람이 종교의 진리를 깨닫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진리는 덕질 대상 따위에 절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빠졌어, 너에게>의 디테일한 배경 묘사, 그리고 그와 어우러지는 소소한 일상의 인물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 정말 필요한 ‘세상을 보는 태도’가 아닐까?

 

나는 요즘 타인을 보는 태도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친구랑 대화를 하다 문득, 내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었던 적이 있다. 친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어느 대목에서 공감이 된다며 신나서 내 이야기를 주저리 늘어놓고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간 나를 보면서, 나의 이야기를 위한 재료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끌어왔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핑계로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던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의 이야기보단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이야기만 대단하게 생각하는 일로부터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곧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중요하게 보는 태도로 이어졌다.

 

나는 <빠졌어, 너에게>가 그런 만화라고 생각했다. 대단하고 비범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소중할 수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생명력 있게 살아 숨 쉬는 배경 속 인물을 그리는 와야마 야마의 세심한 관찰력에서 그러한 태도를 엿보았다.

 

한창 만화 얘기하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세상을 보는 태도로까지 가냐 싶을 지도 모른다. 맞다. 오버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이미 객관성을 잃었다. 이건 <빠졌어, 너에게>를 덕질하게 된 사람만의 ‘진리를 깨달은 듯한 웅장한 눈빛’을 닮은 글이다. 나처럼 <빠졌어, 너에게>에 빠져버린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함께 끄덕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튼, 하야시와 니카이도 너무 귀여워 죽겠다.

 

 

 

최혜민 컬쳐리스트.jpg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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