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도서]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글 입력 2021.03.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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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가 1919년 발표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싱클레어를 중심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데미안, 에바 부인, 크로머, 피스토리우스와 크나우어가 등장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싱클레어가 어떻게 해서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지를 그리며,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싱클레어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데미안』은 성장소설로 평가되는데, 이때 이 성장담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인간 개인의 정체성과 자기발견을 주제화하려고 하나, 소설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유럽인의 자기발견이며 그것을 찾는 배타적 과정이다[1]. 따라서 『데미안』은 성장소설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우 유럽 중심적인 ‘정치적 소설’[2]이다. 따라서 개인과 국가 모두가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고 투쟁하는 과정이 나타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이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1. 주어진 사태를 나의 관점으로 보기



싱클레어는 유년 시절 기독교 신앙심을 가진 가족 공동체 내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으며, 하느님(절대적인 사고)을 신봉하였다. 이러한 사고에 있어 데미안은 의문을 제기하며, 싱클레어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이는 데미안은 주체적으로 성경의 내용에 대해 단 한 번도 회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관점의 방향 전환을 이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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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만테나(이탈리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나무판에 유화 76x96cm, 1457~146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네가 만약 두 도둑 중 하나를 친구로 선택해야 한다면, 또는 둘 중 누구를 믿을지 결정해야 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울어대는 그 개종자를 택하지 않을 거야. 다른 쪽을 선택하겠지. 그쪽은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니까. 그의 입장에서 개종이란 그저 허울 좋고 달콤한 이야기일 뿐이야. 그래서 개종 따위는 조롱해버리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지. …… 그는 우직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거든. 그처럼 유별난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짧게 등장하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예일지 몰라, 그렇지 않니? (데미안, p.78)

 


데미안의 위와 같은 발언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평가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는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절대선, 고귀함과 같은 예수님의 고착화된 인상에 대한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즉,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에 대한 판단 또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3]. 각각의 인간은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 내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개인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흄의 “이성은 정념(passion)의 노예이다”라는 주장과 상통한다. 이 말은 인간의 행동은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이란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는 보편적인 이성에 따라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개인적으로 즉, 자신의 정념에 의거하여 판단하게 되다. 이는 흄에 의하면 도덕감은 선천적인 원초적 감정이 아니라 쾌와 불쾌의 감정에 기초하여 생기는 경험적이며 파생적인 종합 감정이며, 이 도덕감이 선과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이 무엇인가, 즉 무엇이 그 자체에 있어서 옳고 그른지에 대해 따지는 문제에 있어서 이성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한다.

 

데미안의 주장은 기독교 공동체의 모순과도 연결된다.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 조문이 비록 과거의 잘못된 과학적 사실로 인해 한 번 금지로 해석된 적이 있으나 그 후 다시 수정되어 엄연히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낙태를 금지를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즉, 한 번도 목사가 말하는 성서의 주장에 대해,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은 결과이다. 기독교인은 비록 기독교적 세계관(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개인은 이성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그 공동체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공동체의 절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2. 나를 타자화하기



‘나’가 ‘새로운 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부정해야 한다. 즉, ‘나’는 ‘부정된 나’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상태에 있어야 한다.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자기 안의 낯선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은 크로머 때문이다[4]. 그는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으로 채워진 부모님의 밝은 세계와 그와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세계, 소란스럽고 요란하며 음침하고 폭력적인 세계가 자기 주변에 공존하고 있음을 느낀다[5]. 싱클레어는 크로머로 인해 점점 밝은 세계와 멀어지고 어두운 세계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밝은 세계에 속해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 ‘낯섬’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충고로 인하여 완전히 그 자신의 태도를 바꾸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두려움은 우리를 망쳐놓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에 싱클레어는 더 이상 크로머를 보고 두려운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되고 결국 크로머에 대한 싱클레어의 태도는 변하게 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태도가 변한 것이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님을 깨닫는다. 이에 다른 길을 도전해보고자 했으나, 자신에게 너무 버거웠기 때문에 포기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공동체의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싱클레어는 우연히 한 여인을 보고 그 여인이 자신이 꿈에 그리던 완벽한 여성임을 느낀다. 이에 그 여성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의 마지막에서 그는 새로운 자신, 즉 타자화된 자신을 마주한다.


 

어느 날 아침 또 그런 꿈을 꾸다 깨어났을 때 문득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깨달았다. 꿈속에서 그 얼굴은 몹시 친근하게 나를 부른 것 같았고, 어머니처럼 나를 잘 아는 듯 보였으며, 줄곧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 여자 같기도 한 입술, 유달리 밝게 빛나는(그림이 마르면서 그렇게 된 듯) 강인한 이마를 보며 인식, 재발견, 깨달음이 차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최대한 가까이 서서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크게 뜬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초록색 눈.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더 높이 있었다. 이 오른쪽 눈이 가볍고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떨렸다. 이 떨림으로 알아차리게 된 그림 속 인물은 ….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이후에 나는 그 그림의 얼굴과 실제로 내가 기억하는 데미안의 모습을 비교해보았다. 비슷하긴 해도 똑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 그러면서 서서히 그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나와 닮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삶이자 내적 자아, 운명 또는 내 안에 깃든 데몬이었다. (데미안, pp.105-106)

 


이러한 그림 작업을 통해 그는 어둠의 세계에 속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고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내부에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임을 깨닫는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크나우어 또한 기존의 체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크게 방황을 겪는다. 이렇게 자신의 실존에 있어 방황하는 싱클레어와 크나우어는 단순히 그들의 성장 과정에서의 방황이 아닌, 유럽 사회 전체의 방황을 표상한다. 싱클레어와 크나우어는 공동체를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마주 보려 노력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모습을 통해 헤세는 당시 -“공장 식으로” 돌아가는- 대학교 학생들의 “획일화된” 생활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6]. 이는 즉 인간이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회 속에서 도구로 전락해버린 사회의 모습을 비판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함을 주장한다.

 

소설에서 주장하는 그의 비판은 고스란히 현대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여러 면에 적용될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대학입시의 측면에 대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한국 사회는 “반드시 대학교를 나와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대부분)의 대학생은 학업이 아닌 취업을 위한 준비에 몰두한다. 대부분이 대기업 취직 또는 공무원을 준비하며 이것이 일반적인 길로 여겨진다. 사회 공동체가 “대학에 필수적으로 진학하는 아이들”을 만들어 냈고, 대학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학생들은 기계적으로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으며, 회사에 취직해서는 회사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 과정 속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가치관에 회의감을 품고 이로부터 벗어나 갈등 상황을 겪고, 자기 자신을 직면하려는 이들은 극히 소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새로운’ 나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3. 선과 악의 경계 허물기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악마를 의미하는 데몬(Dämon)에서 유래되었다. 이때, 데이몬은 이 책에서 등장하는 아브락사스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락사스는 악마인 동시에 구원자이다. 즉, 데미안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악마라고 간주되지만,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 내에 있는 나(싱클레어)를 기독교적 세계 밖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결국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를 데미안의 도움과 자기 자신의 힘으로 깨뜨리고 나오게 된다. 이 말을 표현한 유명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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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p.114)

 

 

자기만의 세계를 표상하는 ‘알’에서 깨어 나오는 메타포는 일단 죽음이 아닌 삶에의 의지를 나타내며, 자유로운 비상(飛上)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 하겠다[7]. 새는 꿈속에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데 이 변환점이 바로 주인공의 곡절 많은 성장에서 자아의 재편성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순간들을 함축한 메타포이다[8]. 나아가 자기 구원의 가능성으로서 알을 깬 새가 날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의 신이다. 이 신은 천사와 악마가 일체를 이룬 것, 인간이면서도 짐승이며, 최고의 선이자 극단적인 악마로서 아브락사스를 말한다[9]. 결국, 싱클레어는 외부의 자극인 데미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알(세계)에서 나오고자 투쟁하며, 알을 깨고 나와서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경계를 허물음으로써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데미안」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목표의 선의 추구가 아니라 선과 악의 공존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두고 있다[10].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사회 체제, 공동체 가치관에 대한 의심의 시작은 한 인간이 그 사회로부터 탈피하여 더 나은 세계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즉 기존의 자신에서 벗어나서 더 나은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싱클레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수많은 갈등상황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가능해 진다.


이처럼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기까지 (1) 주어진 사태를 나의 관점으로 보기 (2) 나를 타자화 하기 (3) 선과 악의 경계 허물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싱클레어의 여정은 단순히 소설 속의 한 주인공의 여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 인간과 사회 모두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한다. 이는 기존의 상태가 편할 뿐만 아니라 갈등 상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벗어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을 겪음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발생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모두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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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홍길표, 「헤르만 헤세의 ‘정치적 소설’, <데미안>」, 『헤세연구』 42, 한국헤세학회, 2019, p.7.

2. 홍길표, 같은 논문, p.7.

3. 유헌식, 『행복한 뫼르소』, 아카넷, 2017. p.227.

4. 유헌식, 같은 책, p.229.

5. 유헌식, 같은 책, p.229.

6. 홍길표, 위의 논문, p.9.

7. 박정희,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 헤르만헤세의 『데미안』과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 『헤세연구』 19, 한국헤세학회, 2008, p.117.

8. 박정희, 같은 논문, p.118.

9. 박정희, 같은 논문, p.118.

10. 유헌식, 위의 책, p.245.

 

 

[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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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훈
    • 글을 읽다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성서에서 낙태를 허용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성서 어디에 낙태를 허용하는 구절이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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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L
    • 한정훈안녕하세요.
      질문 주신 부분은 제임스 레이첼스, <도덕 철학의 기초> (노혜련, 김기덕, 박소영 역)이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작성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p.123~127까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된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책에 쓰인 몇 가지 부분을 적어드리겠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이 성경에서 낙태를 금지한다고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내기 어렵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종종 몇몇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들이 태아가 완전한 인간이라고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예레미야 1장에 나오는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라는 구절이다. (생략) 하지만 전체 문맥 속에서 보면 이 말은 명백히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 (생략) 이 구절에서는 낙태의 문제도, 태아의 생명의 존엄성도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종류의 문제도 논의되고 있지 않다. (생략)

      성경에는 그 근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낙태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생략) 그런데 교회가 언제나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여기서 논의되는 내용에 따르면, 시기에 따라 낙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일관적이지 않았고, 전통적으로 교회는 낙태를 범죄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7세기에 교회에서 형성된 "호문쿨루스"라는 관념으로 인해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이 생겼다고 하는데, 생물학의 발달로 인해 이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개념이 생기기 전으로 복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를 이어왔다고 합니다.

      저자는 현재의 교회의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권위와 도덕적 판단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이러한 내용에 있어 한 번쯤, 그 이유에 대해 반성적 고찰을 해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맥락에서 이 부분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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