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나약함을 사랑해요 [영화]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2017
글 입력 2021.02.1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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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영국 런던. 매일 아침 커튼을 젖히고 닫힌 창문들을 하나씩 연다. 문이 열리면 열댓 명의 여성들이 거대한 저택에 입성한다. 좁고 긴 나선형의 계단을 줄지어 올라와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고, 재봉틀 소리가 들리면 우드콕 하우스의 하루가 시작된다. 유명 디자이너 레이놀즈는 누나 시릴과 함께 자신의 거처에서 왕실과 사교계 여성들을 위해 드레스를 만들어왔다.


레이놀즈가 16살 때부터 옷을 만들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재혼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어머니는 결혼과 동시에 그를 떠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기억은 곧 트라우마가 되어 그의 삶을 지배한다. 그는 늘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디자이너로서 완벽한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신경증적인 모습과 집중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소한 것에 짜증을 내는 예민함 역시 내면의 허기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가들은 늘 영감을 받을 뮤즈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레이놀즈는 고향 집에 갔다가 주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알마와 사랑에 빠진다. 레이놀즈의 이상형에 완전히 부합하는 그녀는 우드콕 하우스에서 함께 지내며 레이놀즈가 만드는 드레스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을 나누는 동등한 연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알마는 늘 관계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존재하며 단지 레이놀즈에게 영감을 주거나 그를 돕는 조력자의 위치에 머물 뿐이다. 그는 알마가 자신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철저히 배제하고, 음식 요리를 비롯하여 자신이 고집하는 일상의 사소한 법칙들에 순응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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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방향적인 권력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지점은 바바라 로즈라는 여성의 결혼식에서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늘 그렇듯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드레스를 입은 채 드레스로 입을 닦거나 술에 취해 쓰러지는 등 경망스러운 행동을 한다. 결혼식에 동행한 알마는 레이놀즈가 상심해 있는 동안 그를 대신해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직접 나서서 옷을 되찾아온다. 자신의 예술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알마에게 레이놀즈는 키스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레이놀즈에 대한 마음이 한층 깊어진 알마는 이제 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라는 시릴의 충고에도 집에 사람들이 없을 때 그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등 나름대로 이벤트를 준비한다. 이는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사랑을 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다. 하지만 레이놀즈가 이루는 자신만의 세상은 너무나 견고하여, 알마는 여전히 부속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레이놀즈의 삶에서 알마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인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레이놀즈가 알마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 그는 일에 지칠 때마다 기력을 쇠진해 며칠간 침대에 누워 지내는데, 제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매우 연약하고 가녀린 존재가 된다. 알마는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레이놀즈를 볼 때마다, 자신의 도움으로 그가 치유되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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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그녀는 익살스러운 행동에 손을 뻗는다. 자신과 레이놀즈 사이에 거리감이 생길 때마다 음식에 독버섯을 넣어 그가 시름시름 앓도록 만든다. 이를 알 리 없는 레이놀즈는 그녀의 의도대로 갑자기 쓰러져 며칠을 앓았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한 번은 그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그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영을 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는 환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에게 "늘 엄마 생각을 하고, 엄마의 목소리가 꿈에 들린다"고 중얼거린다. 유년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몸만 늙어버렸지 아이와 다름없다.


어머니의 환영 옆으로,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환영을 좇던 그의 눈은 이제 알마에게로 옮겨 간다.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녀에게 레이놀즈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다.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길 요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에서 나가라고 일갈하던 그가 이제는 당신(알마)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고 말한다. 자신이 한 명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어둠에서 건져달라고 부탁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보며 어딘가 불편하고 개운치 않은 감정이 드는 것은 알마가 행하는 기묘한 사랑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관계의 주도권을 가져와 상대방이 자신에게 의존하게끔 하는 그녀의 수법은 확실히 순수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레이놀즈가 아플 때마다 동정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조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가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그녀의 나레이션이나 ‘나는 저주받지 않았다(never cursed)’라는 문구를 드레스 안감에 새겨두거나 하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사랑이 단순히 소유의 욕망이나 쾌락의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가끔 일상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알마가 나약한 상태의 레이놀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때만이 비로소 그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풀려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우드콕의 의상실은 공과 사가 구별되지 않는 공간이고, 레이놀즈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객의 주문을 받아 옷을 디자인하는 일만으로 여념이 없다. 바느질 작업을 너무 많이 해서 집에 가서도 무의식적으로 무형의 실뜨기를 계속한다는 뜻의 영화 제목처럼 그는 늘 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당신과 나 사이엔 늘 거리감이 느껴진다, 당신은 강하지 않다”며 화를 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가 우드콕 하우스의 규율에서 벗어나 편하게 쉬기를 바라는 일종의 연민, 혹은 모성애와 같은 감정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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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뒤 두 사람은 또다시 부딪치며 갈등을 겪고, 알마는 이제 레이놀즈의 앞에서 대놓고 퇴행의 주문을 건다. 담담한 표정으로, 프라이팬에 버터를 넓게 바르고 계란을 푼 뒤, 잘게 썬 독버섯을 볶는다. 그리고 그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으면서도, 그 독약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버섯 한 개를 포크로 집어 먹은 뒤 레이놀즈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알마의 눈을 한동안 응시한다. 이는 앞부분에서 레이놀즈가 알마를 자신의 고향 집으로 데려간 뒤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그때 알마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에게 “저랑 눈싸움하면 못 이기실 텐데요”라고 말했다. 과연 그 말대로 그녀는 우드콕 하우스에 들어가 그곳의 답답한 공기에 변화를 일으켰고, 레이놀즈의 마음을 열었고, 마침내 저주와도 같은 죽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괴로워하는 그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기이하다. 둘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각자의 모난 부분을 깎아 서로에게 들어맞는 사람이 되도록 맞춰간다. 그 과정은 험난해서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사랑을 지속하고, 안정 속에서 완성해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레이놀즈의 드레스처럼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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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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